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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관 전축, LP레코드판에선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가 회전했다 -회전하는 레코드판 전축 턴테이블이 돈다.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시냇물이 흘러내리던,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 국민학교. 서부이촌동 시영아파트 안방. 진공관 전축에서 노래가 나온다. 레코드판에는 들어 있던 노래는 . 임성훈은 이 노래로 TBC가요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76년이었다. 학교 가기 전 아침에 전축을 킨다. 양 손바닥 사이에 검은색 레코드판을 수평으로 낀다. 검은색 플래터(platter) 원반 위에 레코드판을 올린다. 스펀지로 레코드판을 한 번 닦는다. 톤암(tone aram) 앞쪽 검은 카트리지 헤드 밑에 바늘이, 뒤엔 무게추가 달렸다. 손가락 걸이에 검지 손날을 걸어 카트리지 헤드를 든다. 레코드 판이 회전하면, 듣고 싶은 음악 위치에 헤드 바늘을.. 2023. 12. 31.
임종환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정말이야. 전화 왜 했어? 그녀는 승락했네. -그냥 걸었어 같이 부를까 회사에서 그녀를 내보내기로 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여파였다. 우리 부서 나이 어린 막내 후배. 책임져야 할 가정이 없고, 반발이 덜할 듯한 여사원이라서 였을까. 몇 년간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부서 인재였다.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치아 교정기가 살짝 보였다. 그녀는 부서회식 후 노래방에 가면, 내 파트너가 되어 주기도 했다. 노래방에서, 나는 남녀상열지사 노래는 피했다. 건전가요라고 점찍은 것들만 불렀다. J에게, 풀잎사랑, 화개장터 등을 불렀다.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도 불렀다. '그냥 걸었어'는 1994년에 발표된 레게음악이었고, 가수 임종환은 2010년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 '그냥 걸었어' 같이 부를까." 노래방에서 내가 마이크를 잡을 때면, 다른.. 2023. 12. 31.
'한강 조망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 않은 이유, 화장실 죽음과 연탄가스라니 -화장실에서 사람이 죽었다 서부이촌동 11평짜리 시민아파트. [1] 무허가 판잣집들을 헐고, 철거민을 우선 입주시켰던 아파트였다. 서울시에서 무주택 일반인에게 공매한 것이다. [2] 우리 집은 시민아파트 3층. 한강철교 기찻길 옆에 있었다. 화장실은 집 밖에 몰려있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호실 번호가 달린 화장실이 죽 붙어 있었다. 각 화장실은 계단 하나를 딛고 올라가야 했다. 볼일 보고 줄을 당긴다. 머리 위에 설치된 물통에서, 물이 아래로 쏟아져 나왔다. 곧바로 물이 채워지는 소리. 위 물통에서 머리와 얼굴로 물방울이 튀었다. 겨울. 화장실 공동 창문엔 고드름이 열렸다. 바닥은 미끄러웠다. 얼음이 얼었기 때문이다. 바지를 내리고 쭈그려 앉는다. 엉덩이에 차가운 바람이 지난다. 김도 꾸물꾸물.. 2023. 12. 31.
문학의 밤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남궁옥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문학의 밤, 관객은 졸고. 교회 중등부 문학의 밤. 한 두 명씩 하품을 하고 있었다. 피아노 독주가 데려온 졸음 마귀였다. 피아니스트만 홀로 아는 클래식 피아노 곡. 음악회 최고의 곡은 누구나 아는 곡. 최악은 연주자만 아는 곡. 피아노 독주회는 불면증 치료 목적이 아니면 피해야 했다. 우리 중등부 연극의 제목은 였다. 노예 무역상이었던 성공회 신부 존 뉴턴 이야기였다. 뉴턴이 죽을 뻔한 풍랑을 겪은 후, 과거를 참회하는 부분이 연극의 절정이었다. 여름수련회로 유명세를 탄 나도 출연 제의를 받았다. 노예를 파는 역할이었다. "튼튼한 노예 사시오. 30만 원. 거저요" 이런 영혼없는 대사를 읊어야 했다. -경매를 한다 연극이 시작됐다. 따분한 관객. 흔들어 깨워야 했다. 무대에 올랐다. 좌우로 고개를 돌.. 2023. 12. 31.
수면마비 가위눌림 악몽을 이기는 법 '나는 곧 죽는구나' -안개 낀 도로 질주. 도로 위엔 안개가 꼈다. 자동차 전용도로 커브길. 반대편에서 돌진해 오는 차가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눈꺼풀엔 쇠구슬 든 주머니가 옷핀에 꽂혀 달린 것 같다. 눈이 열리지 않는다. 차는 제한속도 80km를 넘어 질주한다. 다가오는 위험을 알 수 없다. 무엇이 앞에서 돌격해 올까? 휘발유가 넘실대는 유조차? 독극물인 벤젠∙염산이 출렁이는 탱크트럭. 수출입화물로 꽉 채운 컨테이너 트럭. 과속으로 내달리는 고속버스. 무엇이 돌격해 오는 건지. 불안하다. 몇 초 후 벌어질 무서운 일들. 머릿속은 공포와 불안. 불바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주변 이마만 들썩. 그렇다. 나는 곧 죽겠지. 달려드는 쇳덩이에 꽝 충돌해서. -이렇게 죽는구나 차체가 쪼그라드는 소리에 페트병.. 2023. 12. 31.
좌측통행, 우측통행. '버스요금요?' 안내양이 2명이었네 -지금은 우측통행, 예전엔 좌측통행 1973년. 국민학교 1학년. 수업을 마치고, 다리가 아프면 버스 타러 갔다. 남정국민학교 앞 사망사고 난 문제의 횡단보도를 건너, 북쪽 왕복 2차선 좁은 길로 7분을 더 걸어갔다. 초록색 체크무늬 가방 플라스틱 손잡이와 신발주머니 끈을 한꺼번에 쥐고 걸었다. 오른손으로 가방을 들었고, 오른 어깨가 내려가지 않게 힘을 잔뜩 주고 걸었다. 그러다 왼손으로 가방을 옮기고, 신발주머니 끈만 오른손으로 잡은 채, 앞뒤로 흔들다 몇 바퀴 휘돌렸다. 실내화는 신발주머니 벽에 딱 붙어서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왼쪽엔 1, 2층 높이의 건물들이 줄 서 있었다. 양장점, 미장원 등 상점 옆 길을 걸었다. 배운 데로 좌측통행을 했다. 요즘은 우측통행으로 바뀌었지만. "차들은 오른쪽 .. 2023. 12. 31.
영등포 문래동에서 나사깎는♪섹스폰이 뭐니? 섹소폰이야. -밴드부 회식 "우리 고교 명가수, 우종오를 소개합니다. 노래는 못하지만, 애교로 봐 주세요 ♪" "안 나오면, 쳐 들어간다. 쿵짜작 쿵짝♫" 고3 악장 형을 짜장면 집 무대로 불렀다. 다들 손뼉 치며 노래했다. 노래는 쉬웠다. "야, 왜 이래?" 악장 형은 뒤로 뺐다. "안 나오면, 쳐, 들어간다. 쿵짜작 쿵작♫" 노래는 계속 반복됐다. 우리고 밴드부는 오류동 짜장면집에서 한 학기에 한두 번씩 돈을 모아 회식을 했다. 짜장면은 흰색 점박이 찍힌 초록 기운의 옥색 멜라민 그룻에 담겨 나왔다. 캐러멜 색소를 넣은 짜장면 소스는 끈적끈적 윤이 났다. 초록색 완두콩이 박힌 짜장면 소스에선 달콤 고소한 고유의 짜장면 냄새가 났다. [1] 나는 노란 단무지에는 손을 안 댔다. 빙초산 같은 식초를 부은 하얀 양파를.. 2023. 12. 31.
'병주고 안티푸라민 약 주고', 몽둥이 찜질과 비명이 난무하는 지옥현장 고등학교 -졸업이나 하자 "왜 가만있니?" 고1 국토지리 선생님은 왜 가만있냐며 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찰싹 쳤다. 이 분은 뒤통수치기로 수업시간을 때웠다. 얼굴에서 열이 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이 선생님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칠판에 판서도 안 했고, 설명도 없었다. 지리책 몇 군데에 줄을 그으라는 게 전부였다. 그는 자기 아내를 '어부인'이라 부르며 자랑했다. 서울대를 한 해에 162명씩 보냈던 특수고등학교 시절, 명성을 날리던 선생님들은 모두 떠나가고 두어 명 정도밖에 없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 같은 젊은 한 두 명을 제외하고, 선생들은 대부분 재활용 불가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전과목을 1학년 때부터 자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졸업장만 따기 위해 폼으로.. 2023. 12. 31.
'애국가가 바뀌었네' 나만 몰랐던 이야기. 안익태 한국환상곡 -애국가가 바뀌었다 애국가가 바뀌었다고? 나만 몰랐나 봐. 늦은 밤 운전하며 들었던 달라진 애국가는 오묘했다. 몇 번 따라 불렀다. 안익태 한국환상곡( Korea Fantasy )의 애국가 부분을 몇 번씩 들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다음날. 차는 새벽 강변북로를 스마트 크루즈 기능으로 질주한다. 폰에는 새로 편곡된 애국가 연주 화면이 지나고, 소리는 차 스피커의 저음을 울리고 있다. 기존 애국가보다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KBS 방송 시작과 끝을 알려오던 그 애국가가 아니었다. ( KBS FM 97.3 MHz 새벽 4시 56분에 방송되는 건, 아직도 KBS 저작권의 옛 애국가이다 ) 연합뉴스 애국가 소개 화면. 팀파니 소리와 함께 관악기들이 연주하고, 화면엔 호른 연주자들이 등장한다. 호른 연주자는 .. 2023. 12. 31.
추억에 관한 모든 것. 삶을 돌이켜 묵상하는 맛은? 독자는 묻는다. "왜 내가 당신의 글을 읽어야 하나요?" 나는 답한다. "함께 여행을 떠나볼까요? 그대 안으로" -추억들 지금도 철없고 영원히 그렇겠지만, 철없던 어릴 적 장면을 떠올려 본다. 기억을 끄집어 헤쳐 본다. 속에는 슬프고 분노에 차있는 내가 있다. 천진한 햇빛 속 나도 있다. 내 안에는, 알아주지 않고 돌봐주지 않았던 내가 산다. 내 말을 들어보고 공감하고 이해해 주려한다. 기억 속 빛바랜 사진들을 꺼낸다. 창고를 뒤져 앨범의 먼지를 떨어낸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지? 질문을 던지고 기다려 본다. 어깨와 귀를 기울인다. 기록물을 탐색한다. -지난날 나 어릴 적 내 캐릭터에 빙의되어 다시 살아본다. 스산하고 매서운 바람소리. 등허리를 녹이는 반가운 햇빛. 어릴.. 2023. 12. 31.
누나의 신비한 몸을 만졌다. 연애할래? 이불 속에선 무슨 일이... -우물 청소. "나랑 연애할래?" "연애가 뭐야?" 누나는 이불속으로 나를 불렀다. 한낮. 대전 대동은 고요했다. 5살. 1970년. 대전. 서울에 갔다가 대전역에 내리면 버스를 탔다. 엄마와 나란히 앉은 버스는 서울과 달리 바삐 출발하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승객을 어느 정도 채운 후에야 출발했다. 대전 집 근처엔 비포장 도로가 많았다. 철근이 실린 나무수레 바뀌는 삐걱대며 먼지를 일으켰다. 수레는 말 한 마리가 끌었다. 네 다리에 붙은 진흙은 말라 갈라져 있었다. 말은 따가닥 따가닥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고 코를 벌룽거리며 숨을 쉬었다. 어른 키보다 높은 담장 위에는 깨진 병조각들이 꽂혀 있어 눈을 아프게 했다. 우편함이 안쪽으로 달린 철문을 열면, 10걸음 앞 오른쪽 좁은 화단 벽에 허연 연탄재 3-4.. 2023. 12. 31.
산낙지는 산에 사는 거 아녜요? 네이년은 누구? 재미있는 단어 공부 -웃으면 복이와요 국민학교 때는 말뜻을 추측했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친구 집에서 보았던 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우리집 사전이라면 국어사전과 역사 정치 분야 백과사전 2권이 전부였다. 아버지 친지 방문 판매원에게서 사놓은 것이었다. 주변에 도서관도 없었다. 글자를 알기 시작하면서 TV가 말뜻 공부에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뚜루. 루뚜루루 / 뚜루. 루뚜루루 루빠, 루뚜와♬" 1973년 국민학교 1학년, 일요일 8시 15분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가 방영되면 tv앞에 앉았다. 구봉서, 배삼용, 이기동, 권귀옥, 박시명, 서영춘, 임희춘, 신소걸 등이 나와 여러 제목의 콩트를 선보였다. -모르면 바로 물었었지 그 해 웃으면 복이와요 코너에는 다음과 같은 콩트 이름들이 붙어있었다. 애인의 선.. 2023. 12. 31.
고려청자 비취색이야? 비치색이야? 빙실들 뭘 알아야지. 1. 빙신들 "빙신들, 뭘 알아야지" tv에 소개된 당시 유명한 학원 강사가 하던 말이었다. 나는 그 빙신들에 속했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책을 읽기는 했지만, 이해도는 낮았다. "송자(宋瓷)에서 고려의 비취색(翡翠色)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橘)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고2 국어 교과서 -윤오영- "비취색이라. 해변을 뜻하는 beach색인가? 그렇다면, 모래사장 색? 모래사장 앞에 있는 바다색? 도대체 비취색이 뭐야?" 비취(beach)색을 모른다고 선생님에게 질문하면, 우리 반 담임이면서 국어 선생님이 뭐라 하실까? 담임선생님은 가만히 있는 나를 비꼬며, 내게 가끔 뭐라 했다. 또 내가 밴드부원이라는 사실이 싫다고 암시하곤 했.. 2023. 12. 31.
'여교사 변사체로 떠올라' 정말 자살일까? 타살일 가능성은? 1. 여고사 변사체로 발견 '서울 n국민학교 여교사 인천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방송 멘트를 들었을 때, 그 여자 선생님 얘기라고 직감했다. 4학년 우리 담임선생님과 친했던 여자 선생님. 정수정(가명) 선생님은 어떻게 죽었을까? 예뻤던 선생님은 그 젊고 활짝 핀 인생을 어떻게 마감하게 됐을까? 왜 인천 앞바다에 떠올랐을까? 40여 년 전의 일이 궁금하다.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여자 선생님 변사 / n국민학교 여교사 죽음 / oo국민학교 여교사 실종 여러 검색어를 동원해 찾기를 몇달. 신문 검색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었나 보다. '학교명'과 '실종' 또는 '여교사'라는 어구로 검색이 가능했다. 2. 정수정 선생님 정수정(가명) 선생님은 4학년 우리 반에 자주 찾아왔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 2023. 12. 30.
'횡단보도를 덮친 버스'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참사가 일어나다니 -학교 가는 길 밤에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 8시였다. 학교를 간다. 아침 먹고 집을 나온다. 허술한 블록담과 시범아파트를 지나 우회전. 원효대교 북단을 뒤로하고 원효로를 쭉 걸어 내려갔다. 등굣길 왼쪽에선 차들이 쌩쌩 달렸고, 나는 불그레한 벽돌담과 회색 벽 옆을 걸었다. 서부이촌동 집에서 남정국민학교까지는 2.5km였고, 어린애 걸음으로는 35분 거리였다. 학교 정문까지 직선으로 100여 미터를 남긴 곳에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 앞에서 당번 선생님들은 호루라기를 삐리리 불었다. 노란 깃발을 들어 차들을 막아 세웠다. 애들이 건너왔다. 울긋불긋 가방을 멘 학생들은, 군데군데 뜯긴 흰 줄을 즈려밟아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수십 명씩 떼 지어 건너온 애들로 내 앞길이 복잡해졌다. 보폭과 보행속도를 줄였다. .. 2023. 12. 30.
와르르 무너진 블록담. 강풍이 휘몰아쳤고, 그녀 오빠는 깔렸고 결국... -성탄절 행사 크리스마스. 서부이촌동 서부성결교회. 크리스마스 행사로 연극을 했다. 세계 각국 남녀 쌍쌍이 아기 예수를 알현하고, 선물을 드리는 장면을 연습했다. 선생님은 한복이 없는 나에게, 빌려온 한복을 입으라고 하셨다. 같은 3학년 얌전한 여학생과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께 선물을 전했다. 손잡고 입장하는 연습을 몇 번했지만, 여자 친구 손을 잡는 설렘은 없었다. 내 마음 속엔 경림이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일날은 예배 후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크레파스 색연필로 색칠하며 2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림 배경에 해를 그리는 것은 금기시했지만, 해가 떠 있기는 하니 그냥 그렸다. 바탕색은 한쪽으로 칠하다가, 빨리 칠하려고 이쪽저쪽 방향으로 문댔다. 여자 선생님은 색칠이 그게 뭐냐고 나를 야단쳤다.. 2023. 12. 30.
송창식 '한번쯤', 김세환 '좋은걸 어떡해 ', '사랑하는 마음' 속에 그녀를 담아 멀리 보냈다 -이 세상 절반이 여자인데 국민학교 입학 전. 태현실 같은 여자 tv 탤런트를 좋아했다. 만져보고 싶고, 얼굴도 대고 싶었다. 단단한 브라운관에 몰래 뽀뽀도 했다. 태현실은 무반응이었다. 그녀는 그저 자기 말을 이어갔다. 피부 접촉이 불가능했다. 그림의 떡일 뿐. 국민학교 1학년. 수업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여유가 생겼다. 반 아이들과 학교 주변 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 각각인 사람들 속에서 발견한 그녀가 혜진이. 혜진이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뽀얀 살결에 환한 얼굴이었으니, 다른 남자애들도 관심을 가졌겠지. -볼 빨개지는 이 것은 언제든 소유할 수 있으면,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혜진이는 기다린다고 오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쉽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주.. 2023. 12. 30.
죽은 엄마가 되어, 혜은이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따라 부른 날 -백합은 냄새를 풍겼다 기도원 강대상 앞 테이블 꽃병. 하얀 백합꽃 몇 송이. 냄새는 저 뒤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꽃향기라 할 수 없었다. 암술머리는 반질반질했다. 설탕물이 묻은 것 같았다. 가까이서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아팠다. 지독했다. 꽃을 빼보았다. 아래쪽에 썩은 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백합꽃엔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 기도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마전도사님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방언을 따라 하게 했다. '할렐루야'를 빨리 외치라고 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룰루라라루야" 이게 소문이 났다. 경미 이모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어려서부터 방언을 할 정도로 성령 충만했다고. 그럴 때마다 내 기분은 별로였다. 자꾸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모.. 2023. 12. 30.
예민한 '완두콩 공주'를 읽고, 그녀 앞에서 뛰었다. 심장도 쿵쾅. -방과후에도 함께 원효로 2가에 있는 남정국민학교. 학교 정문 안쪽 철조망 우리 안에는 원숭이들이 펄쩍 펄쩍 뛰어 놀았다. 신기한 원숭이도 보고, 경림이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나를 방과후 독서반에 넣었다. 독서반 활동으로 동화책을 읽다 집에 갔다. 거기엔 경림이도 있었다. 야호. '공주와 완두콩' 동화를 읽었다. 한 왕자가 폭풍우에 엉망이 되어 찾아온 공주를 테스트한다. 침대에 완두콩 하나를 놓고, 매트리스 12개, 오리털 이불 12겹을 깐 침대 위에서 자라고 한다. 공주는 '한 잠도 못 잤는데, 아래에 뭐가 있는 거냐'고 묻는다. 예민한 공주를 최고 신붓감이라 여기고 왕자는 결혼을 한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여자와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나 보다. 이 얘기는 경림이.. 2023. 12. 30.
군사정권 시절.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그녀를 사랑했지만 결국... -음악시간의 풍금 도-도레미-도♪ 미-미파솔-미 / 솔-라시도시라♪ 솔-파미레 국민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남자인데도 풍금을 잘 다뤘다. 피아노, 풍금 등 음악은 주로 여자의 영역이라 생각했었는데, 남자 선생님이 악기를 잘 다루니 부러웠다. 나도 잘하고 싶었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70년대 피아노 가격은 초임교사 월급의 41배인 70만원 정도로 상상을 초월했다. 반면, 풍금은 월급의 2배인 3만5천원 선이었다.[1] 국민학교에서는 비싼 피아노 대신, 층마다 풍금을 한 대씩 갖다 놓고 각 반에서 공동으로 사용했다. 발로 공기를 불어 넣는 '리드 오르간'. 풍금은 피아노처럼 한 음 한 음 정확히 부딪혀 내는 맑은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쉼없는 페달의 움직임으로 밀려 오는 바람을 이..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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