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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관한 모든 것

예민한 '완두콩 공주'를 읽고, 그녀 앞에서 뛰었다. 심장도 쿵쾅.

by 크루드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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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에도 함께 

 원효로 2가에 있는 남정국민학교. 학교 정문 안쪽 철조망 우리 안에는 원숭이들이 펄쩍 펄쩍 뛰어 놀았다. 신기한 원숭이도 보고, 경림이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나를 방과후 독서반에 넣었다. 독서반 활동으로 동화책을 읽다 집에 갔다. 거기엔 경림이도 있었다. 야호.

 

 '공주와 완두콩' 동화를 읽었다. 한 왕자가 폭풍우에 엉망이 되어 찾아온 공주를 테스트한다. 침대에 완두콩 하나를 놓고, 매트리스 12개, 오리털 이불 12겹을 깐 침대 위에서 자라고 한다. 공주는 '한 잠도 못 잤는데, 아래에 뭐가 있는 거냐'고 묻는다.

 

예민한 공주를 최고 신붓감이라 여기고 왕자는 결혼을 한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여자와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나 보다. 

 

  이 얘기는 경림이도 읽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경림이 엄마

 독서반에서 경림이와 책 얘기를 나누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선생님은 감독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학교 밖을 나서면 경림이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는 표정도 짓지 못했다. 집까지 같이 가지도 못했다. 경림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날까 무서웠다.

 

  경림이 엄마가 독서반에 찾아오셨다. 아는 체 못하고 피했다. 좋아하는 내 짝 엄마라서 부끄러웠다.

  "너는 왜 인사를 안 하니?"

  "아. 네. 저. 안녕하세요?"

  무엇이 그리 부끄럽고 창피한지. 그 엄마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숨으려고 했다. 경림이 엄마 이름은 TV 탤런트 이름과 같았다. 김창숙. 머리는 경림이처럼 조금 길고 코도 뾰족했다.

 

-심장도 뛰고 나도 뛰고

학부모 모임에서 엄마가 들은 얘기를 전했다. 경림이는 6시까지 꼼짝 안 하고 공부를 한단다. 뭐라고? 나는 집에서 책을 펼친 적이 없는데. 난 수업시간에 선생님 입과 얼굴을 뚫어져라 본 것 밖엔 없는데. 예습 복습은 생각도 안 한 내가 부끄럽긴 했다.

 

  근데 뭘 공부한다는 거지?

 

  집 근처 아파트, 작은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다가 긴 머리 반짝이는 경림이와 마주쳤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얼른 손으로 가르마를 정리했다. 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한다. '경림아' 불러야 한다. 경림이의 똘망한 눈을 내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럼 그녀도 내 이름을 불러주겠지. 내 얼굴에 부드런 미소를 전하겠지. 와우, 여기가 천국인 거야. 

  

 그녀 20미터 앞에서 뛰기 시작했다. 경림에게 뛰는 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냈다. 에이. 바보. 젠장. 말을 걸었어야지.

 

-헤어지다

 4학년도 7반. 경림이와 또 같은 반이 되었다. 신은 역시 내 편이야. 점점 외울 게 많아졌다. 경림이가 날마다 공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4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 장례가 끝난 후 경림이 엄마와 경림이가 우리 집에 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다.

 

  5학년이 되면서 남자반 여자반으로 갈렸다. 경림이와 같은 공간에 있지 못하다니. 누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그는 악마다. 나와 경림이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는 악마. 가슴이 무너졌다. 지금까지 같이 있게 해 놓고, 왜? 헤어지게 하는 거야. 

 

  반이 갈린 후, 경림이를 자주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 나는 전학 가게 되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용기 없는 자

  5학년 때 경림이와 헤어졌지만, 언제나 궁금했다. 

 

외할머니댁은 경림이 집 근처였다. 1주일에 한 번씩 외할머니 댁에 갔다. 혹시나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서성였다.

 

  그 후 경림이를 한 차례 보았다. 중학교 소풍에서였다. 어느 여자 중학교에서 나무들이 늘씬히 뻗어 있는 공터로 소풍을 왔다. 학부형으로 따라온 탤런트 사미자 씨도 보였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경림이를 보았다. 경림이가 맞는지 헛것을 본 것인지 혼미했다. 

 

 얼굴만 빨개졌다. 이상하게도 내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달려가서 손이라도 덥석 잡고, 울기라도 해야 하는데... 방황하는 마음과 함께 경림이는 사라져 버렸다. 헤어질 결심도 없었는데. 말 한 번 걸지도 못했는데.

 

  용기 없는 자가 미인을 잃는다.

 그후 수십년을 생각했다.

 

<영탁&이용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

이별이란

빨간 눈물의 꽃이 하나 둘 피는 것.

하얀 믿음의 꽃이 하나 둘 지는 것.

나의 가슴이 온통 무너져 가는 것.

https://youtu.be/bvAQqQPzh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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