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복이와요
국민학교 때는 말뜻을 추측했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친구 집에서 보았던 <학습대백과사전>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우리집 사전이라면 국어사전과 역사 정치 분야 백과사전 2권이 전부였다. 아버지 친지 방문 판매원에게서 사놓은 것이었다. 주변에 도서관도 없었다.
글자를 알기 시작하면서 TV가 말뜻 공부에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뚜루. 루뚜루루 / 뚜루. 루뚜루루
루빠, 루뚜와♬"
1973년 국민학교 1학년, 일요일 8시 15분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가 방영되면 tv앞에 앉았다. 구봉서, 배삼용, 이기동, 권귀옥, 박시명, 서영춘, 임희춘, 신소걸 등이 나와 여러 제목의 콩트를 선보였다.
-모르면 바로 물었었지
그 해 웃으면 복이와요 코너에는 다음과 같은 콩트 이름들이 붙어있었다.
애인의 선물, 연기, 부엌칼, 공모자, 욕심, 흉내, 귀뚜라미 소리, 상봉, 판자집, 고발정신, 새 상품, 어떤 도서관, 청탁, 단벌유감, 불벼락
<아래>1973.10.28(일) = 동문서답, 기사정신, 연행, 어떤 노래자랑, 재수 없는 날.
라디오, 악취미, 짜장면값, 가방 도둑, 오해, 인플레, 엿치기, 바가지, 며느리, 석유파동, 포졸과 도둑, 유언장, 엽총, 호기심, 진실한 벗, 양품점, 무식한 부부, 사열, 연하장, 산타클로스, 전화 참견, 계급, 유언, 다방, 전화...
"아빠, 공모자가 뭐예요?
"아빠, 상봉이 뭐예요?
"아빠, 청탁이 뭐예요?
"아빠, 석유파동이 뭐예요?
"아빠, 허세가 뭐예요?
어렴풋한 말들. 다리를 뻗고 앉아 tv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물으면 아버지는 빠짐없이 대답을 해 주었다.
-나만 몰랐던 말들
3학년이 돼 가면서, 묻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확인하지 않은 말들 중 오래도록 모르는 것들도 있었다.
산새는 산에 사는 새.
산나물은 산에서 채취한 나물.
산낙지는 산에서 사는 낙지.
"산낙지는 산에 사는 거 맞아"
관악산 계곡물에는 송사리도 살고, 가재도 살고 있지.
민물생선도 있고, 바다 생선도 있잖아. 낙지도 바다에 사는 게 있고, 산 계곡물에서 사는 민물 낙지도 있을 거야. 그런 걸 산낙지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
길거리 간판에 쓰인 산낙지는 '山낙지'라고 생각했다. tv에서나 보았던 냉면은 고3 때 처음을 먹어보았고, 산낙지가 바다 낙지라는 것은 20대에 알았다.
-옹알이하는 삶
국민학교 1학년, 빨간 글씨들과 들리던 말들.
화기엄금. 불나면 몸을 낮춰 엄금엄금 기어가고.
공중도덕. 홍길동처럼 지붕 밟고 공중을 뛰어다니는 도둑놈.
몇 년 전에는...
"네이년이 그러던데, 거기 미분양이 많다네요"
"네. 근데, 네이년이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 네이버의 남성명사는 네이놈. 여성명사는 네이년으로 추측된다 )
최신 조어들은 모를 수 있다지만, 다른 것들은 내가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사랑.
개념계단 최상급에 위치한 사랑. 이 개념을 죽을 때까지 알 수는 있을까.
아직도 옹알이를 하며 살고 있다. 말을 흉내 내면서 살고 있다. 말속에는 색깔, 소리, 온도, 촉감, 감정, 살과 피, 밥, 정신, 마음, 영혼, 신, 귀신, 구원, 천국, 지옥, 미움, 사랑 등 모든 게 담겨있는 거 같은데.
나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본다.
"사랑이 뭐야?"
"어? 그건. 글쎄. 음. 뭐. 아마"
< mbc 웃으면 복이와요 19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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