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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관한 모든 것

태현실에게 다가가 뽀뽀를 쪼옥했더니

by 크루드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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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현실 vs. 현실 구분

  "땍띠야 밥 줘"

  TV 드라마 '여로'. 극 중 남편인 영구가 주로 하던 말이었다. 

 

  '여로'는 10월 유신이 있던 72년에 방영되었다. 국민학교 입학 1년 전이었다. 여로의 시청률은 70%. 국민은 tv 앞에서 뜨거웠다. 드라마 방송시간엔 거리가 한산했다. 

 

 

  바보 남편 역은 장욱제. 혹독한 시어머니는 박주아. 아내와 며느리는 태현실. 아들 역할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송승환이 맡았다. 표독한 시어머니 역할의 박주아는, 가끔 봉변을 당했다. 드라마와 현실을 분간 못하는 시청자들에게서.

 

 나도 마찬가지. 현실과 TV를 구분하지 못했다. TV 속 배우들이 보고 있다 생각했다. 나를 못 본 척하고 있는 거지? 

나느 탤런트 태현실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브라운관에 쪼옥. 뽀뽀를 했다. 딱딱했다.

 

-손수건과 만화

  다음 해 73년 국민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운동장에 줄을 섰다. 노래와 율동을 따라 했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자 웃니 아래 이 닦자♬"

 

  코 흘리는 아이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내 왼쪽 가슴에도 하얀 손수건이 옷핀에 꽂혀 있었다. 손수건을 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입학 전 만화방에 갈 때 몰래 달았으니까.

 

  그땐, 만화방 주인 눈치를 봤다. '글자도 모르는 놈이 그림만 보러 왔냐?' 욕할까봐. 하얀 손수건을 달고 갔다. 만화책의 그림만 열심히 봤다. 까막눈이었으니까. 

 

  만화책 속엔 비행기 공중전 장면이. 손에 땀이 났다. 뒤에서 쫓아오는 적기를, 국군 비행기는 다리 밑으로 유인했다. 다리 밑을 지나자, 뿌앙 가속하면서 위로 솟았다가, 360도 거꾸로 돌아 적기 꽁무니를 따라잡았다. 

 

  "드드드득. 드르륵. 드르륵." 

  기관포에 맞은 적기는 추락했다. 와우.

 

-손수건의 의미

  적기를 격추했지만, 국군 비행기도 결국 기관포에 맞아 불시착했다. 조종사는 부상을 당했다. 몰려오는 지상 적군을 향해 비행기를 돌려놓았다. 날개에 달린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적군을 제압하는 듯했는데. 끝내 적의 총탄에 만신창이가 된 온 몸. 이럴 수가.

 

  액션 만화다. 글자가 뭔 필요!

 

  이제 국민학생이 되었다. 하얀 가제 손수건을 달았다. 떳떳하다. 코 닦는 손수건이 문맹을 벗어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렇지만, 코흘리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오래 달지는 않았다.

 

-포마드와 초록 코트

  엄마 없이 처음 혼자서 등교하던 날. 아빠 포마드를 몰래 발랐다. 머리에 가르마를 탔다. 집에서 튀어 나갔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후벼 팠다. 냄새는 100미터 밖까지 날았다.

 

 

  학교에선 남자애들이 놀렸다. '너 포마드 발랐지?' 번득거리는 머리. 자극하는 냄새. 애들의 손가락질.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하는 자책. 스스로 고문했다. 인두로 지져댔다. 하루 종일.

 

  이보다 더한 괴로움도 다가왔다. 겨울이 다가왔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모자 달린 초록색 털코트를 사 오셨다. 단추가 왼쪽에 달린 옷을. 

 

  "에이 여자 꺼야. 안 입어." 나는 짜증을 냈다.

  "아유 좋네. 눈밭에서 굴러도 되겠다." 외할머니가 말했다.

 

  눈밭에서 구르긴? 여자 꺼야 말해봤자 이미 사 온걸. 다음날 그냥 입고 학교에 갔다. 

 미치겠네. 한 여자애가 내 초록 코트를 입고 있네.

 

-정신줄을 놓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초록 코트를 입은 여자애. 초록 코트를 입은 나. 둘은 몸이 굳어 버렸다. 다른 애들의 따가운 시선. 이상한 눈으로 힐끔거리는 남자애들. 또 뭐라 변명하나. 포마드 사건 이후 두 번째네.

 

  고개를 숙여 내 옷을 확인했다. 다른 점을 찾아봐야지. 똑같네. 달린 모자 색깔까지. 

 

  "엄마. 이 것봐. 이게 뭐야.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속으로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슨 소용.

 여자애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 얼굴은 화끈화끈. 식은땀이 몽골몽골. 창피함을 담은 수증기가 하늘하늘 올라갔다. 땀이 식으니 덜덜 떨렸다. 손바닥이 닿은 공책은 젖었다.

 

-정말 화가 났을까

  내일도 모레도 이 옷을 입어야 하나? 수많은 시선을 또 마주해야 하나? 뻔뻔한 얼굴을 해야 하나? 태연함을 보여야 하나? 아. 어떻게 가면을 써야 하나?

 

   겨울방학 전까지 이렇게 신경을 쓰면, 에너지가 남기는 할까.

 

 가해자가 된 기분.

 

  애들이 속으로 뭐라 놀릴까? 같은 옷을 입은 그 여자애는 한을 품고 있겠지. 내게 따지지는 않지만. 무심한 듯 하지만. 화가 났을 거야.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다

  미안해. 내 잘못은 아니야. 어른들 잘못이야. 나도 너처럼 피해자야. 이해해줘. 그렇지만, 미안해. 어떡해. 몰라.

 

  잠 못 자고 끙끙 앓았다. 이 웬수. 초록 코트.

 

  국민학교 인생은 고통이구나. 

 지옥이다. 타인의 시선에 묶인 곳은.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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