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걱정
집에 돈이 없다.
국민학교 1학년. 집안 걱정을 했다. 돈 없다는 소식. 엄마 아빠의 대화 속에서 들려왔다.
1970년. 5살. 11월엔 전태일 분신사건이. 나는 몰랐다. 은행 직원인 아버지는 대출사고를 당했다.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어려운 살림이 되었다. 그 이후 2년이 흘렀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7살되었다. 1972년 8월 3일. '8·3 긴급경제조치'가 취해졌다. 연평균 46%에 달하는 기업 사채를 동결했다. 10월에는 시월유신(十月維新)으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대통령이 의장인 통일주체 국민회의도 만들어졌다.
소용돌이 속 세상. 우리 집은 돈 걱정 소리.
-따라 울었다
1973년에 취학통지서를 받았다. 국민학교 1학년. 그 해 10월엔 4차 중동전쟁과 1차 오일쇼크로 국민은 몸살을 앓았다.
어른들 소리엔 귀를 쫑긋 세웠다. 못 들은 체했다. 어른들은 안심하고 속 얘기를 했다.
교회 부흥집회도 자주 갔다. 부흥강사들은 눈물 짜며 감동적 설교를 자아냈다. 청중은 '아멘'했다. 큰 소리로 복을 잡으려고 했다. 설교 중 부흥강사들은 얼굴을 움찔했다. 울컥울컥. 동화된 청중은 함께 울었다. 최면에 걸린 듯.
나도 울었다. 또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울움이 전염되는 걸까.
-소풍 안 갈래
부흥강사 설교 결론은 자주 헌금이었다. 하나님은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었다. 인간은 은혜를 빚졌다. 소중한 재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이게 당연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음향시설을, 기다란 의자를 마련했다. 건물도 지었다.
헌금 땐 위축됐다. 돈이 없었기 때문. 헌금 바구니는 그냥 나를 지났다.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못 들은 척. 안 들은 척. 딴짓인 척.
집에 돈이 없다는 얘기가 자주 들렸다.
"엄마, 학교에서 소풍 간다는데 난 안 갈래"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 안 갈래"
-잔디밭은 행복이었다
끝까지 우겼다. 김밥을 싸려면, 돈이 들잖아. 음료수와 과자를 사야 하는데, 돈이 들잖아. 이렇게 국민학교 1학년 1학기 첫 소풍은 가지 않았다.
2학기가 되고, 또 가을소풍을 간단다. 엄마에게 졌다. 엄마와 외할머니까지 남산 소풍에 함께 따라나섰다.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김밥을 먹었다.
어린이회관 앞. 넓은 잔디밭은 아직도 풀색. 하늘도 푸르고, 날은 밝았다. 초록 잔디잎은 햇빛을 반사했다. 시선을 변화시켰다. 위로 올라갈수록 파란색은 맑고 진해졌다. 왼팔 오른팔엔 바람이 살랑살랑. 윗바람은 구름을 끙끙대며 밀었다. 구름의 상층부는 흰색으로 환했고, 아래쪽엔 여기저기 어두웠다. 입체적이었다.
햇빛은 좋다. 잔디를 환하게 만든다. 구름에 빛을 넣는다. 마음도 밝아진다.
-광합성
옷은 살짝 따끈. 반팔을 삐져나온 살갗. 가을 햇볕에 광합성을 했다. 봄보다 자외선 지수는 낮았다. 비타민D와 평온을 주는 세로토닌(serotonin, sero=흐르는 액체, tonin=길게 뻗어 늘어진 )을 만들었다.
마음도 광합성을 했다. 햇빛에 싸여 있었다. 잔디 위에 한 동안 꼼짝 않았다. 발을 뗐다. 스드득. 스드득. 잔디 밟히는 소리. 운동화 바닥을 타고 진동이 다리로 올라왔다.
땅은 미세하게 울렁였다. 잔디는 스프링처럼 받쳤다. 초록 땅. 태양이 빛다발을 뿌려주는, 넓은 잔디. 푸르고 걱정이 발 딛지 않는 세계였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찬란한 시간은 종료되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구름아 걷혀라
빛을 반사하던 구름. 어두운 밑바닥을 보였다. 서서히 밀려왔다. 따뜻한 태양의 온도는 숨었다. 마음은 어두운 회색. 휘청거렸다. 태양은 얼굴을 빼꼼 내밀었지만, 희고 어둑한 손으로 얼굴을 자꾸 가리웠다.
아. 이거 왜 이럴까.
구름이 태양을 스르르 막아서니, 내 마음 빛이 사라지는구나.
어두침침한 기분, 울적한 마음은 어디서 온건가.
마음이 헛헛하고, 구멍이 푹 뚫렸구나.
구름아 어서어서 갈 길을 가거라.
우울감에 시달렸다.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반 아이들의 모여라 소리가 들렸다. 게임이 시작됐다. 술래는 두 명. 산토끼 노래. 손수건을 들고 뛰는 아이들. 놀이에 정신이 팔렸다. 어둑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웃음이 피어 올랐다.
엉덩이로 이름쓰기 벌칙을 받았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애들은 박수를 치고 소리 질렀다. 더 요란한 몸짓을 했다.
-애늙은이라고?
웃긴 나를 보여준다는 것. 애들의 마음을 흔들어 웃길 수 있다는 것. 그들을 행복의 나라로 데려갈 수 있다는 것. 내 속에 살고 있던 다른 나를 발견했다.
태양빛을 잃고 방황하던 시공간은 사라졌다. 몸을 흔들며 만들어낸 웃음. 마음에 빛이 다시 스며들었다.
국민학교 1학년 첫 소풍을, 돈 걱정하느라 가지 않았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성숙한 아이였구나'라는 말을 기대했다. '당신 애늙은이였구나' 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애늙은이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의 어릴 적 캐릭터가 좋다. 웃음이 나오고, 공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나를 보면 좋아진다. 그림자 속의 나와 빛 가운데 있던 나.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장막을 걷어라
몇 달이 지나, 외가댁 친척들과 함께 큰 이모 댁에 놀러 갔다. 고3 사촌 큰형의 방. 그곳은 신세계. 외발 탁자 위 전축 자동 턴테이블은 레코드판을 돌렸다. 방문엔 외국 여자 가수 브로마이드가 걸렸다. 검은 페넌트에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란 성경구절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통기타 한 대.
그곳을 다녀오면서, 흥얼거렸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이 노래 앞부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란다. 암막을 걷고, 창문을 열어젖히고 바람을 느껴보잖다.
이야. 선진 세계의 어법이구나.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 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소풍 광경이 노래에 담기다니
소풍 때 보았던 잔디밭이 펼쳐진다. 떠받쳐주던 풀밭 위로 걷게 해 주세.
'걷게 해 주세'라니. 이런 말도 다 있는 거야? 역시 앞서가는 노래구나.
남산 소풍에서 어둡던 내 마음, 울고 웃고 싶었던 내 마음이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거야. 마음을 만져달라고 할 수 도 있어. 놀라운 일이야.
"아하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비와 천둥이 와도 태양은 언젠가 비치는데, 태양만 비치면 살겠다니. 그래. 태양이 없으면 살기 힘들지. 그런데 태양은 언제나 있는 거잖아.
내 눈에
내 얼굴에
내 마음에
빛이 비치니
나는 살아났네.
이 세상엔, 내 마음이 담긴 노래도 있구나.
장막이 막아서고
창문이 가리우지만
너머엔 바람이 산들거린다
느끼고 싶은가
그럼 열어젖혀라
풀밭은 가볍다
나의 몸도 가볍다
소리가 듣고 싶은가
울고 싶은가
웃고 싶은가
비가 온다고?
천둥이 친다고?
그럼 춤을 추자
나는 살겠네
태양만 비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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