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 쓰면 다야?
"왜 카톡으로 글을 보내요. 그 친구들이 보내달라고 했어요?"
"아니, 그냥 내가 쓴 글이니 읽어 보라고 한 건데"
"그거 공해인 줄 몰라요?"
"아냐,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2년 전. 카톡에 글을 써 지인들에게 배포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빨간 색안경을 끼고 봤다. 사람들을 글로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공해라고 했다.
아내는, 정작 작가 자신은 글처럼 살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했다. 살아생전 소설가 이외수의 흔들리는 부부관계도 싫어했다.
이외수가 죽음을 넘나들자, 아내가 그 곁에 돌아왔다. 아내는, 이외수 아내가 돌아온 것은 '의리적 차원이고, 후회를 덜하려는 것'일 거라 했다. 글처럼 살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글에 손도 대지 말라는 신호를 내게도 보냈다.
작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받아쳤다. 똑같은 사람들이고, 말대신 글로 쓴 것뿐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글쓰기』로 유명해진, 작가 강원국의 책 『나는 말하듯이 쓴다』란 제목처럼 글은 말에 불과할 거니까.
아내에게, 아래처럼 풀어 말했다. 아내는 듣기만 했다.
2. 작가와 글은 각자의 길을 간다
글 쓰는 이는 글로 생각을 출산한다. 자식은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아 살아간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살고, 태어난 글은 독자에게 흡수되어 다른 삶을 산다.
작가와 그의 저술은 분리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각자의 길이 있다. 독자들이 실망하겠지만 하는 수 없다.
인류에 큰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갔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직접 구현하지 않았지만.
철학자, 사상가, 작가 등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저술은 자신과 환경을 극복하는 몸부림이었을 뿐. 그들도 사람일 수밖에 없다.
3. 톱니바퀴는 작동하는가?
작가는 시계 속 작은 톱니바퀴 하나를 만드는 장인이다. 중요한 것은 톱니바퀴가 제대로 작동하느냐 일뿐. 만든 이가 개차반이었는지가 이보다 더 중요치는 않다.
시계공의 삶마저 본받을 만하면 금상첨화겠지만, 너무 많은 걸 바랄 순 없다.
성현들이라고 대수인가? 그들은 왜 대접받고 있을까? 말들과 그들 스토리가 미화되어 살아남았기 때문이겠지. 그들의 말이 문자로 책으로 남겨졌다고 지금까지 진리일 수도 없다.
위대한 성인들을 숭배할 필요 없듯, 유명한 작가를 보는 눈도 그러해야 한다. 마케팅에서 효과를 봐, 살아남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글은 지나간 진실이다
성현들의 말, 작가의 저술은 그들이 잠시 탔던 기차이다. 중간에 내려 방향을 바꿔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지나간 글, 책을 통해 그들과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더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의미는 우리 자신의 삶에만 있으니까.
믿었던 정치가의 트위터나 글을 보고 혹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다. 거룩한 시인의 고귀한 시에 감동했다가 그 행실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조리 쓰레기 취급할 것도 없다. 어린아이를 목욕시키고 목욕물만 버리면 되고, 어린아이까지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글로써 타인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키고 싶다면 진실하라. 진실은 사실과 다르다. 사실을 통해 그대가 얻은 감정이 진실이다."
-이외수《글쓰기의 공중부양》 p 98.
글 쓰는 이는 진실하다. 글 쓰는 그 순간만은. 정보나 근거가 빈약해 실수나 거짓으로 판명날 수도 있지만, 순간의 감정은 순수하고 진실할 수 있다. 그러니 독자는, 작가의 순수했던 '지나간 진실'을 엿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100% 믿을 필요도 없다. 잘 나가는 작가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성현을 추앙할 필요도 없다. 시대를 숨 쉬다 사라져 간 인물일 뿐. 장점과 본받을 점만 새겨볼 뿐.
그러니 글 쓰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게 좋을까? 수다를 떤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5. 수다로 풀까
『그래, 수다로 풀자』의 작가 오한숙희는 두 아이의 엄마로 34살에 이혼해 어려운 삶을 사는 듯 했다. 십수 년 전 강변북로길 라디오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다로 삶을 풀어가는 내용이었다. 그때 위협처럼 보였던 '여성학'에 대한 반감도 낮아졌다.
그녀의 말처럼 글이나 말은 수다의 도구이기도 하다. 실용문을 제외한, 소설 · 수필 · 에세이 · 시 등, 지구상 82% 이상의 글은 수다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기쁘고 슬픈 삶을 담을 글들.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글들.
기쁜 수다.
슬픈 수다.
노여운 수다.
공감을 위한 수다.
수다를 위한 수다.
김창옥 교수 강연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얘, 친구야, 나 어때? 살, 많이 쪘지?"
"기집애, 무슨? 딱 좋아. 딱 좋아. 더 먹어."
"하하 하하"
"하하, 호호"
이렇게 수다 떨면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쓰는 글들도, 고매한 분들이 써 놓은 시를 포함한 많은 글들도 수다라고 생각해 본다.
독자가 되어 타인이 써 놓은 수다를 읽어 본다. 읽는 것은 그들의 지나간 진실이요, 수다이니 그들에게 크게 실망할 것도 분노할 것도 없어졌다.
생각 하나를 바꾸니, 마음에 가끔 휘몰아치던 바람이 살랑살랑한다. 아내도 점차 잔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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