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참 쉽다
"1번 답, 기역이지요. 2번 답, 디귿이지요."
달걀이 10분 만에 익을 듯한 날, 스피커로 고3 국어 보충강의가 진행됐다. 1번 답 기역, 2번 답 디귿. 이게 강의라니.
국어 선생님 강의는 사지선다 각 문항마다 정답만 죽 불러주고는 끝이었다. 뭘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는 선생님 아래서 시간만 죽였다. 그 당시 서한샘 강사가 '밑줄 쫙' '동그라미 꽁야'하면서 날리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고3인데.
고3 영어 선생님은 더했다. 별명은 이빨이었다. 10분 동안 영어 지문을 읽고 해석을 해준다. 그러곤. 왼손으로 자기 안경테를 확 낚아챈다. "여기 국회의원 아들 있으면 봐주고" 하면서, 40분 동안 자기 얘기로 시간을 때운다. 자신이 '선생질'하고 있지만, 운전기사 두고 자가용으로 학교 출근하던 사람이라는 둥 정치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둥 놀라운 이빨로 수업시간을 도배하면 종이 울렸다. 영어시간이 아니고 시사시간이었다.
고 1 때부터 영어는 폭망이었다. 별명이 짱구인 영어 선생님. 아구구. 짱구 선생님 입술 위에는, 축소된 지구본 반을 잘라 놓은 것처럼 검은 점이 얹혀 있었다.
짱구 영어 선생님은 영어 한 문장을 읽고 "어"하는 쏠 톤을 냈다. 자습서 해설 부분으로 고개를 돌리는 소리였다. 세월아 내월아 자습서 해석을 읽고, 애들 시키면 끝이었다. 고3 연말 노량진 서울학원 학생 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짱구 선생님을 우연히 보았다.
-서울학원 종합영어 강의실
서울학원 성문종합영어 대형 강의실에는 400명이 넘는 인파로 북적댔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과외금지 조치가 있었지만, 고3 때 국가의 눈을 피해 몰래 학원 견학을 간 거였다. 어깨가 닿아 서로의 체온으로 달아오른 얼굴들. 저마다의 날숨으로 탁한 공기를 마시며 부대끼는 수강생들.
마이크를 잡은 조응호 선생은 가끔 진한 농담을 섞었다. 나는 복도에서 안을 기웃하며 창문으로 강의를 도청했다.
"As가 문장 앞에 오면, because로 해석한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because라...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그랬다.
"저기 너. 그래 너, 네 엄마 아빠 밤 테크닉이 안 좋았냐? 어떻게 그렇게 생겼냐?"
낄낄. 꺄르르 까르르 웃어대는 학생들을 훑어 보는데, 깜딱이야. 짱구 선생도 보였다.
"뭐야. 아니 짱구 선생이 여기서 종합영어 수업을 듣는 거야?"
기가 막혔지만, 여러모로 생각했다. 교수법을 듣는 건가? 영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건가.
서울학원 조응호 선생님은 '美'에 관한 영문을 해석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곧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다." 이렇게 말하곤, 종합영어강의를 이어갔다.
고교 3년 동안, 국영수과 포함 대부분을 독학했다.
실력있고 좋은 인격을 가진 선생님을 만나는 게 소원이었다.
오늘날은 실력있는 선생님들이 넘쳐 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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