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어 같이 부를까
회사에서 그녀를 내보내기로 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여파였다. 우리 부서 나이 어린 막내 후배.
책임져야 할 가정이 없고, 반발이 덜할 듯한 여사원이라서 였을까. 몇 년간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부서 인재였다.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치아 교정기가 살짝 보였다.
그녀는 부서회식 후 노래방에 가면, 내 파트너가 되어 주기도 했다.
노래방에서, 나는 남녀상열지사 노래는 피했다. 건전가요라고 점찍은 것들만 불렀다. J에게, 풀잎사랑, 화개장터 등을 불렀다.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도 불렀다.
'그냥 걸었어'는 1994년에 발표된 레게음악이었고, 가수 임종환은 2010년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 '그냥 걸었어' 같이 부를까." 노래방에서 내가 마이크를 잡을 때면, 다른 마이크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수줍지만 웃음기 있는 얼굴로 가사가 나오는 화면을 보았다. 노래 속 여자 친구 부분을 맡아 주었다.
이 노래는 여자 남자가 대화하는 노래다. 조마조마한 떨림도 있다. 전화받는 역할의 여자 목소리에 언제나 주목한다.
-여보세요. 전화 왜 했어
"여보세요"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해서.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네 생각도 나네.
울적해 노래도 불렀어. 저절로 눈물이 흐르대.
너도 내 모습을 보았다면, 바보라고 했을 거야.
"전화? 왜 했어?"
여자는 따지듯, 끝을 짧게 끊어서 말한다.
감정을 최대한 숨긴다. 남자는 분명히 뭔가 말을 했다. 빗속을 걷다가, 그녀 생각이 나서, 노래하며 눈물까지 흘리며 전화했다고. 이 말이 쑥스러웠다. 그냥 걸었다고 둘러댔다. 여자는 다짜고짜, 용건이 뭐냐고 왜 전화했냐고 물었다.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남자는 움찔했다. 약간 강하게 나오는 그녀의 기에 눌렸다. 혼나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불쑥 전화해서 귀찮게 한 것은 아닌가. 빨리 변명을 해야지.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냥 믿어달라.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이다.
정말 그렇다고 하니, 여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 어디? 다리 아프지? 옷 다 젖었지?
"거기 어디야?"
여자는 상냥하게 말끝을 올렸다.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 걸렸다. 그 남자의 위치도 궁금했다.
미안해 너의 집 앞이야
난 너를 사랑해 우우우우 우우 우우
남자는 미안했다. 약속도 없이 집 앞에 와 버렸네. 빗속을 걷다 그녀 집 앞에 와 있네. 마음 가는 데로 터덕거렸을 뿐인데, 그녀의 집 앞이네. "난 너를 사랑해"하고 남자는 소리쳤지만, 소리는 살아나지 못했다. 가슴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속에서 웅웅거렸다. 소리가 목을 넘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우우 우우.
"다리 아프겠다아. 비 많이 맞았어?"
"옷 다 젖었지?"
속마음을 알아들었을까. 그녀의 목소리엔 안쓰러운 표정이 열렸다. 다리 아프겠다고, 비 많이 맞아서 옷 다 젖었겠다고. 지켜본 듯. 마음을 안듯.
비를 맞아 떨렸던 남자는 이제 '내가' 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나'였다. 상냥한 그녀의 마음에 귀를 대는 내가 되고 싶었다. 전화박스 안에 있는 내 몸의 한기는 점차 풀렸다.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신 듯, 내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했다.
-어떡해
나 그냥 갈까 워우워우워우워 워워 워~
나 그냥 갈까라고 내 마음에 먼저 물었다. 나 가야 하나.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하지. 망설였다. 방금 했던 말들만이 머릿속에 또 반복해 돌았다.
정말 처음에 그냥 걸었고, 비도 왔거든. 기분도 그랬어. 거짓말이 아니야. 너는 거기 어디냐고 물었어. 나는 너의 집 앞이라고 말했어. 근데 너는 다리 아프겠다, 비 많이 맞아 옷 다 젖었냐고만 물었어. 내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 거야? 나는 속으로 외쳤지, 너를 사랑한다고.
< 간주 후 반복 >
"비 많이 맞았지?"
우우 우우
"한참 걸었겠다"
우우 우우~우우 우우
"어떡해"
그녀는 또 물었다.
비 많이 맞았겠다고, 한참 걸었겠다고. 그녀도 망설였다. 더 이상 어떻게 못하겠다고. 나는 그냥 우우 우우 섭섭했고, 울었다. 그녀는 드디어 속 마음을 들켜줬다. 모르겠다고. 집에서 나가기도 그렇다고. 무슨 변명을 하고 나가냐고. 어떡하냐고.
-기다려 나갈게
나 그냥 갈까 워우 워우 워우워
나는 드디어 입 밖으로 말을 던졌다.
나 그냥 갈까. 마지막 메시지였다.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나도 신사라고.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그녀가 정하라고. 그녀가 나를 잡지 않으면, 그냥 돌아서겠다고.
집 앞에서 터벅터벅 돌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바람맞아야 하는지. 만나지도 못한 채 헤어져야 하는 건지. 거절 속에서 헤매야 하는지. 빗물에 뭇매 맞아 좌절해야만 하는지.
"잠깐만 기다려. 나 나갈게"
워워 워워 워워. 워우워우워.
결국 그녀는 결단했다. 만날 결심을 했다. 나온다고 기다리란다.
이제 만나면, 너를 찾아온 이유를 말할 거야. "난 너를 사랑해"하고 소리칠 거야. 그럼 빗물도 놀래 자빠질 거야.
비가 왔고
그냥 빗 속을 걸었어
발길이 너의 집 앞에 멈췄어
그냥 너에게 전화를 걸었어
왜냐고
나도 몰라
그냥 걷다 그냥 걸었어
그냥 너를 사랑해.
여자가 받아 주는 노래.
그냥 걸었어.
비오는 날이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
함께 했던 그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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