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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관한 모든 것

그녀를 사랑하면, 숨결과 싸놓은 똥까지도 사랑스럽다

by 크루드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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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은 숨과 똥도 좋다

 국민학교 1학년. 한혜진은 반에서 최고로 예뻤다. 그녀 가방도, 크레파스도 사랑스럽고 좋았다. 

 

  "그 아이 짝은 얼마나 좋을까"

  "무슨 복이 있어서 쟤와 짝을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쟤랑 떨어져 있는 거지?"

 

  한혜진 얼굴과 옷에선 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단발머리는 찰랑거렸다. 뒷머리는 후라이팬처럼 납작했다. 아기 때 얌전히 누워 있었나 보다.

 

  집에 와, 누웠다. 머리통은 혜진이 생각 범벅. 황홀한 여자. 학교 들어가기 전. 요정이 사는 줄 몰랐다. 혜진이가 숨을 내쉬겠지? 그 바람을 나도 받아 들이마셔지겠지? 으와. 그 아이가 숨 쉬는 이 우주.

 

  한혜진이 똥을 싸놓아도 예쁠 거야. 상상 속 그녀의 똥. 냄새도 향기로와. 빛나고 좋은 똥이었다.

 

-어른이 되고 싶다

  빨리 어른이 돼야 걔와 결혼할 수 있잖아. 나는 아직 어리니. 한숨 뿐. 어른이 부러워. 마음대로 뽀뽀도 할 수 있잖아. 눈치 안 보고 좋아할 수 있을 텐데. 어린 나는 불편해. 자유가 없어.

 

  혜진이는 한 씨고, 예쁘다. 한 씨라서 예쁠까? 당시, 미의 여신은, tv 속 한혜숙. 한 씨는 다 예쁜가봐.

 

  국민학교 1학년이던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 토요일. 법정공휴일이 아니었다. 학교에 갔다. 토요일은 오전 수업만 있다. 예쁜이와 좀더 빨리 헤어져야 한다. 안타깝다. 이 날은 엄마들이 교실에 들어왔다. 색연필, 종합장, 책받침, 연필, 지우개 등을 나눠주었다. 어린이날 선물이었다. 그리고 뒤풀이.

 

-기회는 내가 만든다

  엄마들은 학교 앞 2층 중국음식점에 모였다. 애들은 딸려갔다. 한혜진 엄마도, 우리 엄마도 함께 있었다. 소화제를 사 오는 심부름이 내게 떨어졌다. 혜진이를 납치할 절호의 기회.

 

  "엄마, 한혜진과 다녀올게요"

  "응, 그래"

 

 혜진이 엄마 앞에서 공식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한 마디라도 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되든 안되든,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

 

  Knock and the door will open

  Seek and you will find

  Ask and you’ll be given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다. 요구하라. 받을 것이다.

 

  음식점 계단을 내려왔다. 기회다. 혜진이 손을 낚아챘다. 

  "혜진아, 약국까지 뛰어갔다 오자"

 

-토요일은 낮이 좋아

 복음이었다. 5월의 토요일. 부드러운 햇살. 혜진의 얼굴은 밝은 빛을 반사했다. 요정인가, 천사인가, 여신인가...

 

  황홀감은 강렬해졌지만, 오래 소유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그림자는 돌진해왔다. 기쁨은 슬픔이란 그림자를 데리고 다닌다. 혜진과 함께 했던 시간이 빛날수록, 짙어지는 어두움. 돌아와야 하는 길은 짧았다. 

 

   오른 손엔 약봉지. 왼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쉬움의 소용돌이. 사라질 것들. 손을 놓치면 안돼. 힘을 줬다. 도망 가면 안돼. 혜진아.

 

  그녀와 한 공간에 오래 있지 못했다. 담소를 나누던 엄마들은 마무리하고 있었다.

 

  "엄마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돼?" 입가에만 맴돌았다.

 

-기쁨의 친구는 슬픔

  토요일. 태양은 구름 속에 처박혔다. 토요일은 안색을 바꿨다. 기쁨은 순간이다. 마음은 허전. 도대체 토요일은 즐거운 날일까, 슬픈 날일까.

 

  그 후 5학년 1977년 8월 20일 토요일도 슬픈 날이었다. 여름방학으로 뛰어놀던 토요일 늦은 오후, 동네를 배회하다, 전파상에 전시된 tv에서 만화영화를 보았다. 방학 특집 mbc 만화영화 인어공주가 끝나가는 중이었다. 집에 가면 막을 내릴 테니. 서서 tv에 빠져들었다.

 

  왕자와 마리나 인어공주가 탄 커다란 배. 물결 위에서 출렁거렸다. 나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공주에 빠져들었다. 공주와 왕자는 맺어져야 한다.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 영원히 행복헤야 한다. 나는 왕자가 됐고, 사랑스러운 공주의 눈망울을 영원히 보고 싶어.

 인생은 슬픔에 짓밟혔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자는 마리나 대신, 이웃나라 공주를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고, 비극으로 치닫는다. 마리나는 칼로 왕자를 죽여야 했다. 망설이다, 구원의 도구를 바다에 던졌다. 왕자를 살렸다. 바다에 몸을 던진 마리나.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의 그녀는 물결 속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로 하늘로 올라갔다. 

 

 공주는 사라졌다. 이 세상에 없다. 그녀를 볼 수 없다. 마리나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날. 이 날도 토요일.

 

-잊어야지

  내 마음을 가리고 있던 구름 색깔. 더욱 어둑어둑. 토요일의 사랑은 왜 이리도 힘든 것일까? 왜 사랑하는 사람끼리, 토요일이라도 함께 오래 있으면 안 되는 걸까? 태양도 비추는 밝은 토요일인데, 왜 이렇게 슬픈 거야.

 

  인어공주는 어린이 명작동화 아니야? 가슴을 짓밟아도 되는 거야? 사는 게 이런 거야? 이야기를 왜 이렇게 만든 거야? 왜 또 토요일인데. 도대체 누구야.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 한혜진이 지워졌다. 인어공주 속 왕자처럼, 내게 다른 여자가 생겼던 걸까? 1학년 2학기. 우리 반에는 한혜진이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때문일까? 한혜진이 똑똑한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을까? 소문이 돈 이후, 잠자리에서 더 이상 한혜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똥도.

 

-어린 인생

  나는 배신자일까? 혜진이를 잊었으니까.

  내 마음이 변한 것일까?

 국민학교 1학년은 마무리되었다. 사랑과 어둠을 경험하면서.

 

  어린 인생. 토요일엔 무엇이 있었을까?

 

  사랑이 있었지.

  행복한 상상도 있고

  좋았던 아름다운 환상.

  영원에 대한 생각도 들어있었다.

  밝은 하늘인데 어둠이 교차했고

  슬픈 이야기도 살아 있었다.

  그래도 기쁨이 있었으니

  행복이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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