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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관한 모든 것

오이가 싫다면, 이렇게 오이 맛사지를 해 보세요.

by 크루드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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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청과물 시장

  국민학교 3학년. 학교에서 집에 가는 방법은 2가지. 하나는 그냥 기역자를 아래부터 써 올리듯, 원효로를 타고 여의도 쪽 원효대교로 직진한 후 왼쪽으로 꺾어 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왼쪽 회색의 핏기 없는 블록 담이 줄지어 있어 볼 게 없고 지루했다.

 

 

  다른 경우는 용산청과물시장을 통과하는 방법이다. 시장을 구경하며 천천히 꾸불꾸불 가는 방법이다.

 

  용산청과물시장은 1983년 10월 가락동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원효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용산청과물시장의 넓이는 3만 평이나 되었고, 11월 김장철엔 하루 2천 톤의 채소가 3백50여 대의 트럭에 실려 들어왔다.  

 

  겨우살이 준비 철로 분주한 시기. 담배를 이빨로 문 상인들은 트럭에서 쉴 새 없이 배추를 아래로 던졌고, 아우성 속에 떨어져 나간 잎사귀들은 차바퀴와 사람들에게 짓밟혔다. 짓이겨진 채소는 미끈거렸고, 초록물 쓰레기 덩어리가 되었다. 해가 떠올라 낮 기온이 오르면 빨리 부패해 악취가 코를 자극했다. 질척이는 길바닥은 1km 끝까지 이어졌다. 공용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나서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쓰레기 장이었다. 

 

-쑥대밭은 언제 시작되는 거야

  이런 길에 잘 못 들어서면, 발 디딜 곳이 없어 머리에서 열이 났다. 왼발을 딛고 오른발을 올린 다음에는 어디를 밟을지 자꾸자꾸 봐야 했다. 여기서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왔다. 이 길을 택한 것이 후회됐다.

 

  질퍽한 녹색 쑥대밭으로 돌변하는 때가 언제 시작될지 몰라 가을이 되면 시장 길로 가다 안 가다 했다.

 

 그날은 한 여름. 반팔, 반바지 차림. 학교는 끝났다. 엄마에게서 받은 편도 버스비 10원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용산청과시장 길로 출발했다.

  

  한 여름 태양은 이글. 자외선이 눈을 찔렀다. 눈 뜨기 힘들었다. 인상을 쓰며 걸었다. 체온을 내리려 땀을 조금 냈다. 땀이 적은 체질이었지만, 목은 탔다. 10원은 이럴 때 써야지. 사이다를 찾았다.

 

 사이다 통을 실은 아저씨는 어디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아저씨가 안 보이면 여기저기 찾아다닐 심산이었다. 차가운 얼음과 사이다가 넘실대는 투명 통을 실은 자전거가 보였다. 달려가 동전을 내밀었다. 아저씨는 얇은 투명 호스를 아래로 내렸다. 시원한 사이다가 흘러나왔다. 거품 소리는 쏴악. 사이다 한 컵이 채워졌다.

 

  물 표면에서는 이산화탄소가 숨을 쉬어 댔다. 기포 방울들이 소리를 냈다. 마구 터졌다. 칠성사이다 맛은 아니었다. 차가운 아저씨표 사이다에선 달콤한 향내가 났다.

 

-오이 마사지할래?

  혀 위 사이다는 입안 여기저기 따끔한 거품을 폭파시키는 소음을 냈다. 냉 사이다는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을 새로 뚫으며 지나갔다. 잠시 후 꺼억. 입과 코로 바람이 폭 쏟아져 나왔다. 코가 매웠다. 눈이 동그래지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걸으면, 불룩해진 배 속 물들이 출렁거렸다. 신흥상회 · 대덕상사 · 신일상회 등 간판과 채소 과일을 보며 걸었다. 짐 실은 트럭, 삼륜차들이 오면 한쪽으로 피해 걸었다. 강렬한 햇빛은 제일 약한 눈을 계속 찔러댔다. 남들도 눈 뜨기가 힘들까. 나만 이럴까. 실눈을 뜨고 걸었다.

 

  한 낮 자외선은 가시처럼 등짝을 찔러댔다. 검은 머리칼도 뜨끈뜨. 얼굴은 노릇노릇. 알맞게 구워졌다. 내 얼굴은 까무잡잡했다.

 

  걷다가 걷다가 얼굴이 벌겋게 된 그날. 외할머니댁에 들렸다. 내 얼굴을 본 경미 이모는 내게 물었다.

 

  "오이 마사지할래?"

  "네? 오이 마사지요?"

  "얼굴 씻고 여기 누워봐"

 

-눈을 감았다

  이모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오이를 얇게 썰어 접시에 올렸다. 오이 냄새가 났다. 잘린 곳으로 2E,6Z-논아디에날(2E,6Z-Nonadienal)이란 화학물질이 오이향을 만들어냈다. 오이 물기에 묻은 향기. 방안 공기 속으로 스멀스멀.

 

  오이김치에서 맡을 수 없었던 오이 냄새는 진했다. 오이향은 방안에 서서히 깔렸다. 움직일 때마다 코를 통과했다. 은은했다. 이모가 차가운 오이를 내 얼굴에 올려놓았다. 상체가 움찔했다.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천천히 공기를 빨아들였다.

 

 얼굴 위엔 초록 향기. 차가운 살결을 갖다 댄 오이는 오이 체취를 풍겼다. 그 냄새를 기억에 담았다.

 

  할머니 댁은 시민아파트 2층이었고, 형광등이 꺼진 방안은 적당히 어둡고 알맞게 밝았다. 얼굴에 오이를 얹은 이모와 나. 나란히 누웠다. 눈을 감았다.

 

-오이향은 누가 만들었을까

  오이향은 젊은 이모의 피부에서 나는 걸까. 이모가 만들어낸 향기일까. 생 오이를 잘라 먹기도 했지만, 그땐 향기를 잘 몰랐지. 부러뜨려 먹는 오이는 '먹는 오이 냄새'. 오이김치는 젓갈, 마늘 등 양념이 배인 김치 냄새. 지금은 진짜 오이향. 오이에서 나오는 오이향.

 

 누가 이런 향기를 만들어냈을까. 얼굴은 간질간질. 초록으로 맑은 오이향. 상쾌하고 가벼워진 마음.

 

 눈 감고 오이 길을 걸었다.

  시원함이 산들거리는 길을 걸었다.

  오이향은 초록색이었다.

 

-향기와 기억을 재생할 수 있을까

  국민학교 시절 그 오이향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냉장고에서 며칠 된 오이를 꺼내 썰어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에 올려놓았다. 얼굴에서 두껍게 썬 오이 무게가 느껴졌다. 오이향은 짙지 않고, 약간 어색한 냄새가 났다. 콧 속으로 더욱 많이, 오이 바람을 넣어 본다.

 

  오이비누로 세수도 한다.

  오이향 나는 화장품도 주문해 본다.

 

  그 향기가 살아나면,

  어릴 적 은은한

  사랑과 행복 속에 안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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