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불러 줄래?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효숙이가 노래를 불러 준다. 눈은 먼 곳을 향했다. 배꼽 근처에 두 손을 모았다.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신비로운 가사. 추운 겨울인가 보다. 달그림자도 얼어붙었다. 나도 얼어붙었다.
어릴 적 동화. 오디세우스는 돛대에 묶였다. 자신을 결박시켰다. 세이렌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오디세우스처럼. 나도 그녀의 노래에 묶였다. 효숙이의 목소리. 나를 잊어버렸다. 하늘에서 탄생한 음악이었다.
'물결 위에 차고?' '자고?' 머리를 굴렸다. '자고'가 맞아. 물결 위에 달 빛이 멈춰 있잖아. 아니야. '얼어붙은 겨울'이 나오잖아. 달빛이 '차디차다'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또 번개처럼 지나갔다. '한겨울에 거센 파도'가 이어졌다. 노래는 천천히 흘렀다.
KBS 어린이 합창단원. 내 짝 효숙이. 초등학교 2학년. 그녀에게 노래를 주문해 봤다. 정말 노래를 불러줄까?
"효숙아, 너 KBS 합창단원이니까, 한 번 불러 줄래?"
"좋아. 뭘 불러줄까?"
"얼어붙은 달그림자로 시작하는 노래 있잖아"
-효숙의 최면에 걸렸다
효숙은 몸을 가다듬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눈은 까맿다. 맑았다. 동글거렸다. 노래는 서늘한 공기를 탔다. 피리소리처럼 귓속으로 밀려들었다. 정말 불러주네? 남 앞에서 노래하기 어려울 텐데. 동그란 원을 이어 그리듯, 소리들이 쉽게 밀려 나왔다.
애들 몇 명이 모였다.
"생각하라. 저 등대를."
노래는 점차 위로 떠올랐다. 잔잔함을 밀고 일어서는 중이었다.
"지키는 사람의"
최고조다. 지킨다. 사람이 지킨다. 지키는 사람이 있다. 겨울밤, 달, 물결, 섬 등 자연을 비춘 카메라. 이제 사람을 비춘다. 그리고 명령한다. '생각하라.' 등대를 생각하라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라. 그 마음을 생각하라. 등대가 보였다. 효숙의 최면에 걸렸다.
찬송가인 줄 알았다. '거룩하고'라니. 세상을 잊은 순간. 거룩은 이루어졌다. 천천히 오르내리고, 한 번씩 쉬었다 가는 노래는 재촉하지 않았다.
효숙이 키는 약간 작았다. 얼굴은 동글동글. 피부는 까무잡잡. 윤기가 났다. 도톰한 입술에서 마음을 흔드는 소리가 났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부드럽게 연이어 나왔다. 듣고 있는 나를 보는 것도 신기했다.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문을 두드렸다.
-효숙이는 응답했다
그날 이후. 효숙이는 한 번 더 노래를 불렀다.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내가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구하는 이가 받는다. 찾는 이가 찾는다.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다. 이 건 진리다. '반드시' 100%는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높다.
구한다고 찾는다고 두드린다고 반드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게 좋다.
그럼 가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효숙이는 내 두드림에 응답했다.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제 효숙이가 나를 두드린다.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한다. 기억 속 효숙이를 살려낸다.
고마운 효숙이.
단발머리 빛나던 효숙이.
밝고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 준 효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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