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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관한 모든 것

춤바람이 난 것은, 일요일 교회 다녀 온 직후였다

by 크루드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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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네 마루

  철우, 영기, 나는 삼총사. 6학년 때 셋은 대림동 양문장로교회에 다녔다. 

 

  일요일 아침이면, 우리 집과 20미터 거리인 철우 집에 먼저 들렀다. 대문 옆에는 철우 아버지 성함이 한자로 쓰여있는 문패가 달려 있었다. 문을 열기 전에는 문패의 이름을 흘깃 쳐다보게 된다. 자주 보는 이름이라 낯설지 않았다. 철우 집에 갈 때마다, 한글로 이름이 박힌 공로패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름에도 왠지 무게가 있는 것 같았다. 

 

  철우네 마루는 번쩍였다. 벼룩이 뛰어오르다 미끄러져 관절을 삘 정도였다. 철우 어머니는 짙은 나무색 마루를 자주 닦았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주웠다. 철우 어머니가 잡채밥을 해 주셨을 때, 나는 밥 위에 올려진 잡채를 먼저 먹어야 하는지, 비벼 먹어야 하는 건지 몰라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철우가 교회 갈 준비가 되기까지,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 위 책을 봤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도 뒤적였는데, 글자가 많아서 읽지는 않았다. 철우는 이 책을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다고 했다. 한국문학전집도 보였다. 모두 우리 집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국민학교 이전부터 나는 다른 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집에 없는 신기한 것들을 보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이 것 저 것 만져보고, 남들이 안보는 틈을 타서 서랍도 열어봤다. 작은 외할머니는 내가 들들 뒤지고 다닌다고 했다.

 

  철우는 누나도 있다. 이름은 돌아가신 우리 엄마와 같았다. 고등학생이었던 누나 방 책장에는 프랑스어 사전이 있었다. 누나가 덕성여대에 합격한 후, 우리 셋과 철우 방에서 밤새 포커게임도 했다. 크리스마스 가까운 겨울. 포커게임으로 올나잇을 했다. 점점 판돈이 커져 갔다.

 

-누나와 카드놀이는 최고였다

  그 방안 공기는 약간 시원했고, 다리는 이불속에서 꼼지락댔다. 돈으로 바둑돌을 분배하고 놀이를 했다. 점차 억 단위의 돈을 베팅하기 시작했다. 부자가 된 듯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놀아주는 누나가 고맙게 느껴졌다. 누나는 큰 키가 아니었지만, 미인이었기 때문에 스튜어디스가 됐다. 이런 누나를 누가 데려갈지.

 

  철우와 영기 모두 누나가 있다. 누나나 형이 있으면 선진문물을 접하기 쉽다. 서로 티격태격하겠지만 보고 배울 수 있고, 때론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니 부러웠다.

 

  철우 집 소파 테이블 위에는 무기 화보집도 있었다. 여기엔 전투기 F-16이 선회성능이 우수하다는 설명과 사진이 들어 있었다. F-16이 비행 중 좌우로 꺾고, 뒤로 돌아 유턴하는 장면의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조립식 비행기 모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광탄으로 총알 길을 보았다

  국민학교 때, 나는 가끔 비행기 그림을 그렸고, 프리덤 파이터(F-5A) 같은 조립식 비행기 모형을 만들어 놀기도 했다. 이 비행기는 1950년대 오래된 모델이었고, 팬텀기가 좀 더 진보한 비행기였다. 당시 한국 공군의 주력 전투폭격기는 팬텀기(F-4E)였다. 월남전에서 네이팜탄으로 숲을 불바다로 만들며 위력을 떨치던 팬텀이었지만, 화보집을 보니  최신 F-16이 더 좋은 비행기였다.

 

  그 화보집에는 불빛을 발산시키는 예광탄 사격 장면 사진도 있었다. 쏜 화살은 날아가는 길이 보이지만, 총알은 쉽게 볼 수 없다. 총알은 유령 같아, 대체 어느 길로 갔는지. 이 사격 장면은 궁금함을 해소시켜 주었다. 사진을 통해 총알의 길을 볼 수 있다니. 총알 길은 밝고 길었다. 빠지직 전기용접 불빛처럼 밝았다. 총알이 날아가는 무서운 속도가 예광탄 불빛 속에 있었다. 만화 속 레이저 총 발사장면 보다 더 실감 났다.

 

-지휘봉

  총알이 저런데, 전쟁터에서 얼굴을 내놓고 조준사격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총을 들고 싸운다면, 앞을 쳐다보지도 못할 것이다. 궁금해서 얼굴을 참호 위로 올리는 순간 어떻게 될까? 바로. 끽이다.

 

  마루 책장에 있는 철제 군인 지휘봉도 신기했다. 조금 무게가 있었고, 만지면 차가웠다. 위아래를 왼손과 오른손으로 잡고 반대로 돌리면, 삐걱 거리며 열렸다. 손잡이 쪽에 덜 날카로운 양면 검이 붙어 나왔다. 나무 재질로 가볍고 더 좋아 보이는 다른 지휘봉은 잘 만지지 않았다. 그것은 철우 아버지가 중령 시절에 실제 사용하셨던 것이라 생각했다.

 

  철우가 교회 갈 채비를 끝내면, 함께 영기네 집으로 향했다. 영기네와 양문교회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대문과 현관문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약간 어두운 나무색 계단에는 배달 온 야쿠르트가 가끔 있었다. 영기가 하나씩 주면, 은박지를 벗겨 혀에 대 보았다. 향기 나는 오리지널 야쿠르트였다.

 

-영기네 어머니는 대식구를 먹였다

  철우네 집은 수평으로 넓었고, 영기네는 수직으로 넓었다. 영기네 1층에는 같은 나이인 중근이가 살았다. 그 집에는 한두 번 들어가 보기만 했다. 그 아이 엄마가 약했기 때문에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 했다.

 

  영기네 안방에선 어머니가 가끔 크림으로 마사지를 하셨다. 안방 TV는 LG 칼라 TV였다. 우리 집 삼성 TV와는 달리, 영기네 TV는 저음이 좋았다. 우리 것은 잘 못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가전제품은 여러모로 LG가 앞서갔다.

 

  영기 방은 공고 다니는 형과 같이 썼다. 형은 소리 나는 전기회로 키트, 광석라디오 등을 보여주었다. 그 방은 넓지 않았지만, 가끔 책상 위 선반 등 수납공간이 달라져 있었다. 영기네 아버지가 목수이셨기 때문이라 짐작했다.

 

  평소 점심 때는 작업장 직원들이 올라와 밥을 먹었다. 영기네 엄마가 밥을 차려 냈는데 날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게다가 우리도 가끔 점심때 놀러 갔으니.

 

-설거지를 한다

  영기네 누나 눈은 토끼눈처럼 동그랗다. 얼굴은 하얗고, 편안한 미소가 있었다. 누나는 말도 천천히 부드럽게 했다. 우리에게 귀찮은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직장에서 사용하는 텔렉스 용지 샘플도 보여 주었다.

 

  인켈 전축이 있는 마루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면 역기가 놓여 있다. 영기는 갑바를 만든다며 벤치프레스를 여기서 했다. 하얀 털이 빽빽이 삐죽삐죽한 스피츠도 옥상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영기네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 영기네에 새로운 규칙이 생긴 것 같았다. 영기가 컵에 물을 마신 후에 싱크대에서 씻은 후 엎어 놓는 것이었다. 물 마신 컵을 씻어 놓는다는 개념이 그동안 없었는데. 영기 집에 변화가 생겼다. 그날 이후 우리는 물컵을 바로바로 씻어 놓았다. 라면을 먹은 날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냄비 설거지를 해 놓았다.

 

-One Way Ticket

  일요일 아침 삼총사는 이렇게 철우 집, 영기 집을 거쳐 교회에 갔다. TV 볼 시간이 사라져 섭섭했지만.

 

  중등부 교회활동은 재미없었다. 우리끼리가 즐거웠다. 일요일 교회 모임이 끝나면 영기 네로 직행했다.

  라면 네 다섯 봉을 끓여 밥도 말아먹었다. 설거지도 잊지 않았다.

 

    1979년 중1 일요일 어느 날. 교회 갔다가 우리 셋은 철우 집에 갔다. 철우는 안방 전축을 켜고, 원웨이 티켓을 틀었다. 그 해는 보니엠의 짝퉁, 그룹 Eruption의 One Way Ticket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때였다.

 

 One way ticket, one way ticket to the blues

 Choo, choo, train a-trackin' down the track

 

  칙칙폭폭 기차에 편도 차표만 끊는다. 사랑은 떠나고 눈물만 흐른다. 쓸쓸한 마을서 심장 터지는 호텔에 간다. 이 바보.

 

-춤은 신세계

  원웨이 티켓은 이렇게 슬픈 가사였다. 슬픈 노랫말은 빠른 리듬에 실렸고 춤추기 좋다. 우리는 생전 처음 디스코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철우는 안방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원웨이 티켓에 맞춰 스텝 시범을 보였다. 이 걸 언제 연구해 냈을까. 따라 하는 영기와 나는 왼발 오른발이 꼬였다.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입에선 계속 웃음이 나왔다. 

 

  리듬에 손발이 맞춰져가니 점점 재미가 생겼다. 잘하게 되니 더 하고 싶었다. 우리들은 신나는 춤곡에 맞춰, 황홀한 몸짓을 했다. 마음 속 춤바람이 났다. 

 

  몸이 살아있어 춤을 춘다. 춤을 출 수 있는 몸은 신통하다. 춤은 살 맛 나게 한다.

 초등학교. 최고의 즐거움은 춤이었다.

 

Eruption - One Way Ticket >

https://youtu.be/pDbQ1D2ca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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