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절반이 여자인데
국민학교 입학 전. 태현실 같은 여자 tv 탤런트를 좋아했다.
만져보고 싶고, 얼굴도 대고 싶었다. 단단한 브라운관에 몰래 뽀뽀도 했다. 태현실은 무반응이었다. 그녀는 그저 자기 말을 이어갔다. 피부 접촉이 불가능했다. 그림의 떡일 뿐.
국민학교 1학년. 수업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여유가 생겼다. 반 아이들과 학교 주변 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 각각인 사람들 속에서 발견한 그녀가 혜진이.
혜진이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뽀얀 살결에 환한 얼굴이었으니, 다른 남자애들도 관심을 가졌겠지.
-볼 빨개지는 이 것은
언제든 소유할 수 있으면,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혜진이는 기다린다고 오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쉽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주변을 맴돌기만 해야 하니,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입에 달린 풍선처럼 커져갔다.
혜진이 얼굴에선 빛이 났다. 보석처럼 여러 각도에서 반짝였다.
혜진이와 유일한 친구가 돼야 하는데, 다른 녀석들보다 내가 더 멋져야 하는데.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향한 해바라기일 뿐.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누워 혜진이를 생각하고, 어른이 되기를 소원했다. 그녀의 숨을 들이마셨다. 어쩌다 잘 못 눈길이 마주치면 심장이 덜컹거리고 볼이 빨개졌다. 이 건 내가 혜진이를 좋아한다는 몸의 신호였다.
-좋은 걸 어떡해
변화가 온 내 몸과 마음. '보고 싶고 좋아한다, 좋아하니 보고 싶다'만 내 속에 돌고 돌았다.
이 마음을 사랑이라 불러야 하는지. 좋아하는 마음이라 해야 하는지. 좋아하는 마음이 사랑인 것인지.
무얼 겪고 있는 걸까. 누구에게도 내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나 홀로 나를 알아낼 수 있을까. 상사병이라도 앓고 있는 건지. 왜 이리 계속 그녀를 신경 쓰고 있을까. 나만 이런 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누구나 그런 건가.
좋은 걸 어떡해 / 그녀가 좋은걸 ♬
누워 흥얼거렸다. 국민학교 1학년인 73년에 김세환의 <좋은 걸 어떡해>(이장희 작사 작곡)가 세상을 평정했기에, 그 노래가 내 입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눈감으면 떠오르고 / 꿈을 꾸면 나타나고
안 보면 보고 싶고 / 헤어지기 싫어지네 ♬
이 노래엔 내 몸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 그녀를 생각하고, 꿈속에서도 보고 싶고, 학교를 마치고 헤어지기는 것도 싫고.
이 노래의 1절만 계속 돌려 불렀다. 굳이 이 것이 사랑인지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사랑은 어려운 말이지만, 좋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tv속 어른들에게나 해당하지, 내게는 필요치 않았다.
어려서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것은 구체적 언어지만, 사랑은 뭔가 많이 들어 있는 심오한 느낌이 들고 복잡하다.
이 노래 2절 끝에는 좋아하는 게 사랑이란 추측성 결론이 들어있다.
그냥 네가 좋아 / 아마 이게 사랑일 거야 /
아마 이게 사랑일 거야♬.
-노래만 남아 있다
<좋은 걸 어떡해>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내 마음을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니. 나만 특수하고 이상한 놈이 아니었다.
그 노래를 자꾸자꾸 불렀다. 살짝 내 귀에 들리게 노래했다. 리듬에 맞춰 엄지에 힘을 주어 발을 까딱까딱. 쿵짝쿵짝 베이스 리듬에, 고개는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머릿속 악기들이 뚱땅뚱땅 연주를 하면, 가사를 읊조렸다.
나는 없어지고, 노래만이 존재했다. 노래에 마음이 잠기는 순간은 혜진이 생각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한혜진 얼굴은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소문과 함께 마음에서 떠나갔다.
-망설이는 그녀를 기다린다
3학년이 되자 경림이의 찰랑거리는 머리칼과 오똑한 코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로 인해 마음이 타올랐을 땐, 두 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래 두 곡은 74년작 송창식의 <한번쯤>, 그리고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이다.
먼저, 송창식의 <한번쯤>엔 걷는 남자의 타들어가는 속 마음이 들어있었다. <한번쯤>은 기회를 잡지 못하고, 걷기만 하는 사람의 조바심을 노래했다. 용기 없이 주저하는 마음이 담긴 이 노래를, 송창식은 나사 빠진 듯 입을 크게 벌리고, 멋쩍게 웃는 낯으로, 나사 풀린 듯 불렀다.
한번쯤 말을 걸겠지 /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아아하♬
1절에선 그녀가 말을 걸어오길 기대하며, 앞서 걷는 자신의 속마음을 그렸다. 뒤따라 오며 망설이는 것은 그녀라며 먼저 말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 말을 붙여 오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 집에는 다 와가는데
왜 이렇게 망설일까 / 나는 기다리는데
뒤돌아 보고 싶지만 / 손짓도 하고 싶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기다려 봐야지
-행동이 없으니 아무 일도 없다
2절에선 반대로, 그녀가 앞서 간다. 그녀를 뒤따라 가는 나는 속만 태우고 있다. 앞서가는 그녀가 뒤돌아 보기만을 기다린다. 1절에선 그녀가 먼저 말하기만을, 2절에선 그녀가 먼저 뒤돌아 봐 주기만을 기다린다.
한번쯤 돌아서겠지 /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아아하 /
겁먹은 얼굴로 / 뒤를 돌아보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 집에는 다 왔을 텐데
왜 이렇게 앞만 보며 / 나의 애를 태우나
말 한번 붙여봤으면 / 손 한번 잡아봤으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천천히 걸었으면 ♬
송창식은 망설임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녀가 망설인다고 여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속 말만 한다. 말을 붙이고 손 잡는 시도를 않기에, 노래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맞는 말이야. 어린이날인 토요일, 혜진이 손을 과감히 낚아챘잖아. 그러니 손을 잡아봤지. 내 용기 있는 행동은 <한번쯤>보다 나은 거였어. 앞으로도 이렇게 하는 거야. 혜진이 손 잡은 이후, 내 안에 미세한 용기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런 용기는 잠재해 있다가 3학년 짝을 정할 때 다시 발휘되었어. 경림이와 짝할려고, 앞 2명을 뒤로 보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 이런 게 용기란 거야.
-아마 이게 사랑일 거야
다음 노래는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송창식 작사, 작곡)이다. 여기선, 사랑이란 기분 좋은 거라 하고, 주고받는 관계를 말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눈길을 주고 눈길을 받는다. 손길을 주니 손길을 느낀다. 주고받는 상대가 있게 되고,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행복이 된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 더 좋은 건 없을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 흐뭇한 건 없을걸
사랑의 눈길보다 / 정다운 건 없을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 짜릿한 건 없을걸
혼자선 알 수 없는 / 야릇한 행복
천만번 더 들어도 / 기분 좋은 말
사랑해 ♬
경림이와는 손 한 번 잡지 못 했다. 망설임과 시도하지 않는 <한번쯤> 상황으로 후퇴해 버렸다. 경림이가 사랑의 눈길을 내게 쏜 적이 있던가. 나를 보고 싶어 하기는 했을까. 경림이는 내 손을 잡고 싶었을까.
뭐라 답할 수 있을까? 그녀의 속 마음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니, "잘 모드겠는데요." 영구처럼 대답할 수밖에.
나 혼자 환상 속에 살았던가.
짝사랑이었던가.
아니야.
그녀도 나를 좋아했어.
아마 이게 사랑일 거야.
어릴 적 사랑은 노래에 실려 떠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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