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억에 관한 모든 것

벌침 뽑고 빨고 놀던 가을. 죽어가는 엄마에게 억새풀을...

by 크루드 2023. 12. 30.
반응형

-벌을 먹었다

"아얏."

벌침에 쏘였다. 손가락에 꽂힌 검은 벌침. 나는 벌과 놀았고, 엄마는 죽어가고 있었다.

 

 

강변북로 옆 서부이촌동. 시영아파트 발코니에선 노량진과 여의도가 보였다. 63빌딩 건축 전. 창문으로 한강을 바라보았다. 해는 매일 떨어졌다. 기울어가던 해가 강물에 산산조각 나는 날들은 계속됐다.  

 

 시영아파트 뒤쪽 풀밭을 지나 철조망까지 다가갔다. 철망을 손으로 잡고, 사이에 발을 끼어 넣어 기어 올랐다. 꼭대기에서 앉은 자세로 뛰어내려 강변북로를 살폈다. 차가 뜸해지면 치타처럼 뛰어 건넜다. 국민학교 4학년 당시에는 지금처럼 차가 많지 않았다. 

 

 반대편에 다다르면, 경사진 한강 제방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여기엔 커다란 돌들이 45도 경사를 이루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다.

 

 박힌 돌 사이에는 코스모스가 가슴까지 올라와 있었다. 벌들이 코스모스에 앉으면, 나는 사냥감을 발견한 사자처럼 어깨를 낮추었다. 꽃에 앉은 벌을 벗은 신발로 낚아챘다. 휘휘 돌려 땅에 내려쳤다. 벌을 벌이 기절하면 침을 뺐다. 투명 내장이 딸려 나왔다. 꿀이 들어있을거야. 빨아먹었다. 

 

 벌향기가 났다. 급하면 코스모스 꽃잎을 맨손으로 오므렸다. 벌은 꽃 속에 갇혔다. 벌침에 찔리면 손가락이 후끈 욱신 거렸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며

 한강변엔 꽃말이 원망인 물억새도 허옇게 피어 있었다. 갈대라 생각했다. 물억새는 바람에 고개를 흔들며 버텼다. 

 

어른들의 기도문 속에는 갈대가 들어있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기도를 가끔 들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 마태복음 12장 20절 개역개정 성경 ) 

 

엄마가 낮에 누워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병세는 악화되었다. 눈 위는 푹 꺼져있었다. 눈 밑은 옅은 먹물색이었다. 엄마를 오래 볼 수 있을까. 뭔가 선물을 해야지. 그런데 뭘? 한강변에 핀 물억새 아니 그 갈대가 풍성하잖아. 

 

 "하나님, 엄마에게 선물할 것은 갈대 밖에 없어요. 상한 갈대도 안 꺾는 하나님,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  

 

-엄마 찾아 삼 만리

 그날 한강변에서 물억새를 한 묶음 꺾어 강변북로를 건넜다. 철조망을 기어 올라 땅바닥에 쿵 뛰어내렸다. 흔들리는 물억새에선 허연 꽃들이 풀풀 떨어졌다. 바람에 흩날려 멀리 날아가기도 했다. 

 

아파트 부엌에서 물억새 밑동을 가위로 잘랐다. 빈 법랑 화병에 꽂았다. 화병은 자주색이었다. 빨간 피가 생각났다. 억새는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는 미간에 힘을 주고 누워있었다. 간간이 소리도 내었다. 엄마는 대부분 누워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면, 안 아픈 얼굴색을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다음날 엄마는 또 고통하겠지.

 

 76년 6월 금요일 6시부터 TBC에선 '엄마 찾아 3만 리'가 방영되었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 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아아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 만. 리"

 

 

 이 방송 주제가는 내 마음을 읊고 있었다. 듣고 있으면 멀쩡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노래는 울부짖었다. 가슴을 찢었다. '아아아, 외로운 길' 목놓아 부른다.

 

영원한 이별이 생각났다. 만화영화 노래가 들릴 때마다. 엄마를 영영 못 볼지도 몰라. 

 

'엄마 찾아 3만 리'는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 방영되었다. 엄마를 보았다. 껍데기뿐이었다. 억새풀 같았다. 

 

나는 엄마를 찾아다녔다. 아르헨티나에 간 엄마를 찾아다녔다. 주인공 마르코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다.

 

-억새를 보면

 엄마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안 아픈 엄마가 보고 싶었다.

 

 두 달 후 11월 엄마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셨지만, 아직 곁에 있는 엄마. 방문을 열고 엄마를 찾았다. 별 속에 있을 엄마를 찾아 밤 하늘을 올려 보았다. 

 

가끔 

갈대를 닮은 억새를 만나면 

쓰다듬는다.

 

< 엄마 찾아 삼 만리>

https://youtu.be/Faqs_LXyheg

반응형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