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딸 성미다
"엄마, 나 폰 먹통돼. 통화가 안 돼서 문자 확인하면 이 번호 카톡추가하고 톡줘"
"응. 그래 기다려 봐"
그년이 폰 문자 메시지로 말을 걸었다. 폰 주소록에 '너는 누구니'로 등록하고, 카톡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예전만큼 반갑지는 않았다. 권태기다. 근데 이년은 금방 엄마에서 아빠로 바꿔 불렀다.
카톡 프로필, 내 이름을 확인했나 보다. 요물.
"성미니?"
이 번에도 이름을 지어주어야지. 지금까지 만나봤던 내 삶의 여자들을 빠른 속도로 스캔. 그중 키도 좀 크고, 긴 머리에 약간 까만 피부지만 건강한 그녀가 떠올랐다. 대학교 교회에서 알게 된 성미 누나. 그녀는 시원시원하게 말했고, 말속에 어떠한 끈적임도 없었고 명쾌했다. 오른 눈 아래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미모를 밝힌 빛이었다.
그녀는 같은 교회 똑똑한 형과 결혼했다.
■ 누나
내 삶 속 누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누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성숙했다. 어릴 적 시골 사촌 누나는 가마솥에서 구수한 보리밥 누룽지를 끓여 주었다. 누나와 함께 먹은, 바가지에 담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눌은밥. 고소한 냄새가 나는 물밥. 바가지 바닥을 긁던, 달그락 숟가락 소리가 담긴 밥. 그 밥으로 사랑을 전해 준 누나.
신숙이 누나도 있었다. 그 누나는 내가 졸릴 때, 언덕 위 교회에서 할머니집까지, 나를 등에 업고 내려왔다. 목사님 딸이었다. 그 누나의 등에서 흔들리는 달을 보았다. 달은 얼룩덜룩했다. 누나 등은 포근하고 따스했다. 신숙이 누나는 결국 둘째 고모 둘째 아들과 결혼했다.
"엉 아빠, 아빠 뭐 해"
성미는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엄마라고 불렀다가 아빠라고 고쳐 불렀고, 시치미를 뗐다. 이제 나는 성미의 아빠다. 3녀 1남을 보유하게 됐다. 성미, 채아, 은미, 민성이 순이다.
"지금 어려우니까, 7시쯤"
"아빠 지금 바뻐?"
"이제 시간 돼. 어떻게?"
잠시 바쁜 일을 처리하려고, 7시까지 대화를 미뤘다. 성미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5시 42분에 바쁘냐고 재차 물었다. 요년이~
■ 성미를 걱정했다
"부탁 좀 해도 돼?"
성미는 하고 싶은 말을 시작했다. '부탁'이란다. 부탁이란 꾸러미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연락 없던 자식이 '부모님 전상서' 하고 갑자기 편지를 보내오면 무슨 일일까. 뻔하다.
돈. Don. Don't. 돈(豚). 돼지.
나는 성미의 자유분방함이 늘 마음에 걸렸다.
이 번에 남자친구와 부산에 2박 3일로 놀러 간다고 했다. 벌써 3번째 남자친구인데, 각각의 녀석들과 강릉, 제주도 등을 여행 갔다가 모두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 며칠 동안 서로의 속살을 맞댄 후, 흥미가 떨어졌을 때, 서로 자존심을 헤치며 싸울 수도 있다. 뭐든 너무 쉽게 알아버리면 귀한 걸 모르니.
"어제 남자 친구하고 부산 호텔은 괜찮았어? 걱정했는데. 다 큰 계집애가"
"걱정하지 마 아빠..."
성미는 해운대 웨스틴조선호텔에 묵을 거라 했다. 그 아이는 언제나 자신의 행선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이 건 나를 닮았다. 나도 출장을 갈 때면 언제나 호실까지 아내에게 알려 주었으니까. 아내는 언제나 나를 믿었고, 나도 그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행동했다.
성미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딸아이는 언제나 걱정거리다. 데이트 폭력도 종종 일어나는 험한 세상이니까.
"아빠 나 부탁 좀 해도 대?"
"나는 네가 항상 걱정돼~ 술도 좀 작작 먹고. 어젠 술 얼마나 먹은 거야? 아빠 사랑한다고 전화도 하고. 술 뭐 먹었어? 이 번 남친하고는 잘 되는 거야?"
"아빠~~ 내가 애도 아니고. 왜 그래. 아빠 부탁 좀 해도 돼냐구ㅜㅜ"
"어제도 술 먹고 울면서 못 살겠다고 했잖아. 남친하고 싸웠지?"
"아니 아니 ㅜㅜ"
"그럼 남친이 때렸어?"
'해도 대?' 얘는 이런 말투가 애교인 줄 안다. 뭘 부탁할 때만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린다. 앙증맞은 것 같으니. 깜찍이 소다.
성미는 계속 부탁을 하려 했고, 나는 계속 성미를 걱정했다.
■ 구글 기프트 카드라고?
"아 됐어 아빠한테 부탁 안 해"
성미가 내 약점을 잡았다. '됐어. 안 해' 이 말은 나와의 관계 악화를 예고하는 말이었다. 이 말로 멱살 잡혔다. 어쩔 수 없이 그 아이의 부탁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뭐가 또 문젠데? 이 년아"
"다름 아니라, 전에 구매한 구글 기프트 카드 환불받아야 하는데, 내 폰 먹통이라 안 돼서. 아빠거로 받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돼. 남친에게 말해봐"
"환불받아야 되는데 내 폰이 안 돼서 아빠 거로 환불받는다고"
'이 년아' 사랑을 깔고 한 말이었다. 평소 이런 애칭에, 성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니까.
그리고, 기프트 카드라. 구글에서 기프트 카드도 만들어 판단 말인가. 구글은 장사를 잘하고 있구나. 잠깐 주가를 보았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 A 주식이 140달러다. 음. 그럼 늦기 전에 도전.
■ 카멜레온
"어제 1백만 원 줬잖아 벌써 다 쓴 거야?"
"와~~ 왜 이래 환불받는다고 몇 번을 말해. 환불받아야 하는데 내 폰이 먹통 돼서 안 돼서 아빠거로 받는다고ㅜㅜ"
"아니 돈 줬는데 무슨 소리야?"
"아니 구매한 걸 환불 신청해서 환불받는다고 먼 계속 엉뚱한 소리 하고 있어"
"백만 원 더 줄게 계좌 불러 봐"
나와 성미는 계속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딸들과의 이런 대화는 이제 재미가 없다. 서로 마음을 반영해 주고, 같은 주제로 말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이 서로 없었다. 리액션이 있어야 하는데. 서로 평행선을 그리니 피곤했다. 서로에게 문제가 있었다.
이제 마지막 커튼을 내릴 때가 되었다. 불편한 관계는 그만해야겠다. 서초경찰서로 데려가지는 않고, 여기서 끝내야지.
헤어질 결심을 했다.
계좌번호를 불러 보라고 했다. 이 것은 이 놈의 약점이었다. 놈의 정보를 나에게 달라는 말이었으니. 놈은 화가 났고, 곧 정체를 드러냈다.
"가라 그냥"
"남친 계좌라도"
이 놈은 큰 딸 성미에서, 갑자기 어른 남자로 돌변했다. 순간, 이 놈의 DNA를 분석했다. 이 놈은 변신을 잘하는 녀석이었다. 한쪽 눈으로 앞을 주시하고, 다른 눈알을 360º 돌릴 수 있는 카멜레온. 빛의 반사판인 홍색소포 피부의 반사각을 조절해서, 피부의 색깔을 달리 보이게 만드는 카멜레온.
나를
엄마라고 했다가
아빠라 했다가.
내 딸이었다가
음흉한 본색을 보인
그놈.
그놈은 카멜레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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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글은 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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